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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대일 긴장 모드를 조선통신사 파견으로 푼 세종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108)

낙동강 낙단보 의성 쪽 선착장에 조성된 ‘박서생 통신사공원’의 수차 모형. [사진 송의호]

낙동강 낙단보 의성 쪽 선착장에 조성된 ‘박서생 통신사공원’의 수차 모형. [사진 송의호]

우리나라는 오랜 기간 일본과 가깝고도 먼 이웃이었다. 지금은 외교적으로 그 거리가 더 멀어졌다. 우리 역사에서 태평성대를 이끈 세종은 이웃 일본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했을까.

세종은 즉위 첫해 이종무를 보내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의 소굴 쓰시마를 정벌했다. 그러면서 조선과 일본은 긴장 관계가 조성된다. 일본은 승려를 보내 쓰시마를 공격한 진의를 파악하려 했다. 세종은 왜구를 압박하면서도 일본에는 신의에 바탕을 둔 대등한 교린(交隣)을 강조한다. 실리 외교다. 그래서 1428년(세종 10년)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란 이름의 외교사절단을 처음으로 파견한다. 통신사(通信使)란 ‘서로 신뢰가 통하는 사절단’이란 뜻이다.『세종실록』에 당시 기록이 나온다.

“일본 통신사(通信使) 대사성 박서생, 부사(副使) 대호군 이예, 서장관 전부교리 김극유가 길을 떠나는데, 신주(新主)의 사위(嗣位)를 하례하고 전주(前主)에게 치제(致祭) 하기 위함이었다.”

사절은 일본의 새로운 쇼군(將軍)을 축하하고 사망한 전임에 조의를 표하기 위해 떠난다는 뜻이다. 일본의 무로마치(室町) 막부는 그해 5월 쇼군 아시카와 요시모치(足利義持)가 사망했음을 조선에 정식으로 알려왔다. 이어 7월 막부는 다시 아시카와 요시노리(足利義敎)가 그 자리를 계승했다면서 조선에 사절단 방문을 요청했다. 세종은 국서(國書)를 보낸다.

박병훈 율정기념사업회 회장이 수집한 조선통신사선 모형. [사진 송의호]

박병훈 율정기념사업회 회장이 수집한 조선통신사선 모형. [사진 송의호]

“큰 명(命)을 받아 즉위했으니 기쁜 마음 이길 수 없습니다. 이에 사신 성균 대사성을 보내 귀국에 하례를 드립니다. 변변치 못한 토산물은 작은 성의일 뿐이니 받아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생각건대 귀국과 우리나라는 대대로 호의(好誼)를 닦아 조금도 변한 적이 없었으니 이제 선대의 뜻을 이어 신의(信義)를 더 돈독히 한다면 이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통신사 박서생은 사행(使行)에서 교린의 임무는 물론 조선 백성에 도움이 될 게 무엇인지 떠올리며 당시 일본 문물을 대한다. 조선통신사는 세종의 국서를 전하고 쇼군의 답서를 받은 뒤 왜구에게 잡혀간 노비 6명과 함께 돌아온다. 그리고 한양을 떠난 지 1년 만에 세종에게 복명한다. 박서생은 이어 일본을 벤치마킹한 제도를 조선의 개혁 방안으로 건의한다. 15개 항목이다. 그는 일본이 군사 수만에 배는 1000척이 넘을 것 같다는 정세 판단부터 보고한다. 이어 일본에서 보고 겪은 화폐 유통을 강조한다. “일본은 도읍부터 해안에 이르기까지 돈을 베나 쌀보다 훨씬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여행하는 사람들은 비록 천 리를 가더라도 돈꿰미만 차고 식량을 휴대하지 않습니다.” 일본이 여관에서 숙식을 제공할 때 현물 대신 돈을 받으니 관련 산업이 발전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선세(船稅) 등 각종 세금도 모두 돈으로 바치게 하자는 전납세제(錢納稅制)를 제안한다. 그리고 200여 년이 지나 조선에 상평통보가 등장한다. 상가의 혁신도 언급한다. “일본 상가(商街)는 널빤지로 층루를 만들고 물건을 그 위에 두니, 먼지가 묻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쉽게 보고 살 수 있었습니다…(중략)바라건대 운종가(雲從街) 좌우 행랑부터 동쪽 누문(樓門)에 이르기까지 물건을 진열할 층루를 만들어 어느 간(間)에 무슨 물건을 둔 곳이라 간판을 달아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하소서.” 박서생은 우리나라 시장이 어육 등 식품까지 맨땅에 두고 앉기도 하고 밟기도 한다면서 시장의 변신을 실용적 관점으로 제시한다.

박서생의 고향 경북 의성에 세워진 높이 5 m가 넘는 ‘조선초대통신사율정박선생기념비’. [사진 송의호]

박서생의 고향 경북 의성에 세워진 높이 5 m가 넘는 ‘조선초대통신사율정박선생기념비’. [사진 송의호]

박서생의 고향 의성에는 그를 기념하는 거석이 세워져 있다. 그는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한다는 ‘무본후생(務本厚生)’을 강조했다. 세종은 박서생 통신사와 같은 창의적인 관료의 도움을 받아 일본과의 관계를 명분이 아닌 실리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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