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폭설로 무너진 숙성창고의 오크통서 살아남은 위스키

중앙일보

입력 2021.08.2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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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김대영의 위스키 읽어주는 남자(133)

“다시 오셨네요.”
 
쭈뼛거리며 바에 들어서길 주저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바의 문을 열기 전에도 몇 번이고 망설였을 것이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부터 어색해한다면 그건 순전히 바텐더인 내 탓이다. 어찌할 줄 모르는바 입구에 서 있는 손님에게, 그래서 첫 마디가 중요하다.
 
“잠깐 얼굴을 보인 것뿐인데 기억하시네요.” 
“그럼요, 그게 제 일인 걸요.”
 
그는 두 시간 전쯤 우리 가게를 찾았다. 그때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온 그가 술에 취해 바 테이블에 얼굴을 묻은 손님을 둘러업었다. 그가 내게 얼굴을 보인 건 바로 그 순간. 가볍게 묵례를 하고 그는 재빨리 문밖으로 나갔다. 문밖에는 술에 취한 손님의 차가 세워져 있었고, ‘삐 빅’이라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자가용 대리 기사 쯤으로 추정되는 손님이 자리에 앉자 마자 자신의 딸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사진 pixabay]

 
술에 취한 손님을 뒷좌석에 실은 그는 나를 향해 다시 한번 묵례를 하고 운전석에 앉았다. 검은 세단이 밤의 정적을 뚫고 향하고, 밝게 빛나던 후방 라이트도 밤에 묻혀 자취를 감춘다.
 
“한번 와보고 싶었어요. 이런 곳.”
 
그가 신기한 듯 바 내부를 샅샅이 둘러본다. 온통 나무로 된 백바와 테이블, 그리고 의자. 바 테이블을 기분 좋게 쓰다듬던 그가 묻는다.

 
“이런 나무는 어디서 구하죠? 국산인가요?” 
“한국에는 이렇게 큰 나무가 잘 없어서요. 보통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가져오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희 가게는 인도네시아산입니다.”
“만지기만 해도 기분이 참 좋아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주문을 안 했군요. 아까 제가 모시고 간 손님 같은 분은 어떤 술을 드시죠? 저도 같은 걸 마셔보고 싶습니다.”
“아까 그 손님은 싱글몰트를 좋아하세요. 이것저것 다양하게 드시는 분이라 딱히 이거라고 할 만한 건 없지만, 글렌피딕을 가장 좋아하시죠.”

 
“그걸 한 잔 마셔볼 수 있을까요?”

 
백바에서 글렌피딕 12년을 꺼내 캐런 잔에 담에 그에게 건넸다. 처음 보는 잔의 생김새가 신기한 듯 유심히 잔을 살피던 그가 말을 꺼냈다.
 
“이거, 어떻게 마시는 거죠? 사실, 이런 술 처음 접해보거든요. 이런 잔도.”
“일단 코를 잔 입구에 바싹 붙인다는 느낌으로 향을 느껴보세요. 그리고 한 모금 마신 뒤 입에 조금 머금고 있다고 삼키고 입 안에서 감도는 향을 코로 느껴보세요.”
 

위스키 오크통과 글렌피딕 스노우 피닉스를 담은 글렌캐런 잔 [사진 pixabay]

 
그가 알려준 대로 위스키를 음미한다. 눈을 감고 위스키의 맛과 향을 느끼던 그가 몇 모금 더 맛을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연다.
 
“정말 향긋하네요. 조금 독한 느낌도 있지만, 어딘지 소주보다 부드러운 것 같기도 하고…. 이런 술이었군요. 그런 사람이 마시는 술이란 게.”
 
그가 차를 멈춰 세운 곳은 청담동의 한 아파트 지하 주차장. 뒷좌석에 곤히 잠든 손님을 슬쩍 살핀 뒤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채 3분도 지나지 않아 눈이 떠졌다. 어느새 이 시간에 적응이 돼버린 걸까.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차 주인의 가족사진 한장. 아름다운 부인과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두 딸 사이에 뒷좌석에서 곤히 잠들어있는 남자가 있다.
 
“이런 차에 이런 집에 이런 가족…. 이 사람은 부러울 게 없겠군.”
 
그에게도 아내와 딸이 있다. 첫사랑의 아련함을 가진 보통의 남자처럼, 마지막 사랑일 거라 확신하는 아내에게 최선을 다했다. 아내와의 결실로 딸이 생기고, 그 딸이 커나가는 걸 보면서 행복함을 느꼈다. 비록 풍족한 생활은 아니었지만, 아내와 딸의 웃음 한 번이면 그 누구보다 마음이 부풀어 오르던 그였다.
 
“딸이 중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부쩍 표정이 어둡더라고요. 전 그저 사춘기가 왔겠거니 했어요.”
 

중학생인 딸을 괴롭힌 같은 학교 아이들이 벌을 받게 됐지만, 딸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누구도 치유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사진 pixabay]

 
중학생 여자아이는 새로운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런 아이를 괴롭히던 아이들이 있었다. 쉬는 시간마다 심부름을 시키고, 방과 후에는 폭력을 가했다. 처음에는 머리를 몇 대 툭툭 치던 것이 뺨으로 내려오고, 발길질이 시작되자 온몸으로 폭력은 퍼져나갔다.
 
“한여름인데 집에서 긴 팔만 입는 거예요. 그때까지도 사춘기라 예민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죠. 아내도 밤에는 식당에서 일하느라 딸을 잘 돌볼 틈이 없었고요. 저희는 학교, 학원, 독서실 이렇게 세 군데만 성실하게 다니는 딸로 기억했어요. 열세 살에서 열네 살로, 한 살 많아진 것뿐인데 얼마나 딸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가 있을까 싶었죠. 너무 무지했어요.”
 
딸은 방에서 나오지 않기 시작했다. 그때야 사태를 파악하고 그는 학교를 찾아가 담임과 교장 선생님 앞에서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렇게 딸을 괴롭힌 아이들이 벌을 받게 됐지만, 딸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누구도 치유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수백 번, 아니 수천 번 설득했어요. 방문을 사이에 두고 딸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전학 가서 새롭게 시작해보지 않겠느냐고요. 그런데 쉽지 않네요. 이 모든 게 제 잘못이에요. 딸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 제 탓이죠.”
 
백바에서 위스키를 꺼내 글렌캐런 잔에 담는다. 그에게 잔을 건네고 백바 아래에서 박스 하나를 찾아내 위스키병과 함께 내놓았다.
 
“글렌피딕 스노우 피닉스입니다.”

“아, 이것도 글렌피딕이군요. 아까 마신 12년보다 좋은 건가요?”

“글쎄요. 싱글몰트 위스키는 각자 개성이 뚜렷해 뭐가 낫다고 하긴 어렵죠. 이것저것 마시다 보면 자기한테 맞는 위스키가 있는데, 그게 가장 좋은 위스키가 아닌가 싶습니다.”
 

폭설 탓에 숙성창고의 온도가 영하 19도까지 내려간 열악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은 오크통에서 뽑은 위스키 원액만으로 만든 술이 '스노우 피닉스'이다. [사진 pixabay]

 
그가 위스키의 향을 맡더니 한 모금 맛을 본다.
 
“아까 마신 것보다 더 따뜻한 느낌이에요. 뭔가 제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느낌이랄까요.”

 
“사실, 이 위스키에는 특별한 스토리가 있습니다. 위스키는 숙성이란 과정을 거치는데, 숙성창고는 일정한 환경 아래 놓여있습니다. 계절의 변화를 몇 차례나 경험하면서 숙성이 되는 거죠. 그런데 이 글렌피딕 증류소의 숙성고 중 한 곳이 폭설로 무너진 적이 있습니다. 숙성창고의 온도는 한때 영하 19도까지 내려가 오크통은 아주 열악한 환경에 놓인 거죠. 하지만 그런 환경에서도 살아남은 오크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오크통에 든 위스키 원액만으로 만든 게 바로 이 위스키입니다. ‘스노우 피닉스’라는 이름을 붙은 건, 당시 무너진 숙성창고 천장의 모습이 마치 불사조와 흡사했기 때문이죠.”

 
“열악한 환경이지만, 거기에서 살아남는다. 그러면 이렇게 맛있는 위스키가 되는 거군요.”
“어쩌면, 영하 19도에도 무너진 천장을 통해 쏟아진 햇살이 오크통에 희망을 줬을지도 모르겠네요. 따님도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고 있을 겁니다. 제아무리 닫힌 문이라도 틈새는 존재하는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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