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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술 빚진 절친에겐 이런 '중저가 브랜디드 위스키' 답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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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김대영의 위스키 읽어주는 남자(132)

“싱글몰트 위스키 한 잔 주실래요?"

체크무늬 반팔남방에 반바지, 아쿠아슈즈 차림의 남성이 처음 우리 가게를 찾았다. 나이는 30대 초반쯤 되었을까. 아직은 어릴 적 짓궂은 얼굴이 남아있고, 바라는 공간은 처음 찾은 듯 긴장한 모습이 역력하다.

“물수건입니다. 평소 좋아하는 싱글몰트 위스키라도?”
“아, 그게 저는 싱글몰트를 전혀 모르거든요. 얼마 전에 친구네 집에서 발베티라는 걸 마셔봤는데 맛있더라고요.”
“발베니를 드셨군요. 싱글몰트를 좋아하는 친구를 두셨나 봐요.”
“네, 이게 그때 마신 위스키 사진인데….”
“아, 이건 발베니 쉐리 싱글캐스크군요. 꽤 좋은 위스키인데요? 보통 위스키를 좋아하는 친구가 아닌가 보군요.”
“네, 중학생 때부터 친구였던 녀석인데 언젠가부터 위스키를 마신다고 하더라고요.”

친구 사이는 한번 멀어지면 다시 가까워지긴 쉽지 않다. 나이가 들수록 더 그렇다. [사진 pixabay]

친구 사이는 한번 멀어지면 다시 가까워지긴 쉽지 않다. 나이가 들수록 더 그렇다. [사진 pixabay]

까까머리 시절 둘은 만났다. 한 명은 작았고 한 명은 컸다. 작은 아이는 언제나 괴롭힘의 대상이었다. 쉬는 시간이면 매점에 가서 빵과 음료를 사와야 했고, 점심시간에는 도시락 반찬을 빼앗기기 일쑤였다. 그런 작은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친구는 없었고, 점점 혼자만의 학교가 되어갔다.

“어? 너 자전거 타고 학교 다니냐? 몸집도 작은 게 자전거는 꽤 잘 타네?”

큰 아이와 작은 아이는 함께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를 했다. 자전거에서 내리면 둘의 몸집 차이는 상당히 컸지만, 자전거에 탔을 때는 둘의 키도 엇비슷했다. 가끔은 한강까지 자전거를 타러 다니곤 했다.

“그만해! 너무 한 거 아니야? 이제 좀 그만 괴롭히지?”

큰 아이는 작은 아이를 지켜줬고, 둘은 같이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물론, 작은 아이의 반찬은 여전히 빼앗기고 있었다. 큰 아이에게. 그러나 ‘친구’에게 빼앗기는 반찬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고등학교는 서로 떨어졌어요. 그래도 한동네에 사니까 종종 만났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제가 그 친구보다 큰 거예요. 늘 올려다보던 그 친구를 내려다보니까 기분이 참 묘하더라고요. 요즘도 만나면 그 친구는 저를 조그맣다고만 생각해요."

대학을 가고 군대에 갔다. 그리고 졸업 후 취업. 취업한 지도 벌써 5년이 넘게 흘렀다. 한 번 역전된 둘의 키는 변함이 없었지만, 무언가가 둘의 사이를 벌리는 듯했다.

“저는 제대로 취업을 못 했어요. 사실 대학도 전문대를 나왔는데, 성적이 형편없어 아무렇게나 진학한 학교였어요. 그러니 뭐 제대로 공부를 할 리도 없었죠. 맨날 선배 동기 후배들과 만나 술이나 마시며 학교생활을 했죠. 그러니 누가 저를 뽑으려고 하겠어요. 졸업하고 할 일을 찾다가 유통업체에 들어갔죠. 거기서 계약직으로 3년 정도 일했어요.”

여느 날과 같이 일하던 중에 그는 허리에 큰 부상을 입었다. 쌓여있던 물류가 그를 덮쳤고, 쓰러진 그의 허리에 한 번 더 충격을 줬다.

“이대로 인생 끝나는지 알았어요. 허리가 얼마나 아프던지. 한 1년 고생했죠. 아무 일도 못 하고 병원에 물리치료만 받으러 다녔어요.”

우여곡절 끝에 배달원으로 일하고 있는 그는 여름엔 더위로 유난히 힘들다고 한다. 일을 마치면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 된다. [사진 pixabay]

우여곡절 끝에 배달원으로 일하고 있는 그는 여름엔 더위로 유난히 힘들다고 한다. 일을 마치면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 된다. [사진 pixabay]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햄버거 체인점 배달원. 친구가 점원으로 있는 가게에 일손이 부족하단 이야기를 듣고 가서 일을 시작했다.

“그게 벌써 1년 전이에요. 지금까지 이 아르바이트를 할지 몰랐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다른 일자리도 찾아보고 했는데, 허리가 아프다 보니 일자리 찾는 데 제한이 많더라고요. 여름엔 더위 때문에 유난히 힘이 들어요. 일을 마치면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 돼서 빨리 집에 들어가 쉬고 싶은 마음뿐이죠.”

그가 온갖 우여곡절을 겪는 중에도 친구와의 만남은 계속됐다. 때를 정해놓고 만나진 않았지만, 누군가 한 명이 괜스레 술을 마시고 싶을 때 불러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그 친구에게 한 마디 툭 내뱉으면 풀리는 기분이었어요.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었죠. 그런데 요즘엔 좀 부담스러워졌어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저를 다시 작게 만들고 그 친구를 크게 만드는 것 같아서….”

친구는 4년제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취업했다. 회사를 옮기거나 하는 일 없이 한 자리에서 쭉 일하면서 대리도 달고 승승장구했다.

“우리 사이엔 한 가지 룰이 있어요. 반드시 한 번씩 번갈아가면서 술을 사는 거죠. 그걸 10년 넘게 지켜왔는데 요즘엔 제가 돈이 없어서 그 친구가 계속 술을 사고 있어요. 체크카드에 만 원도 없는데 그 친구가 술을 마시자고 했을 때, 너무 괴롭더라고요. 처음엔 돈을 빌려서 술을 샀는데, 그것도 한계가 있어서 요즘엔 얻어 마시고만 있어요. 다 기록해놓으라고 하면서. 나중에 다 갚겠다면서. 하지만 그 친구도 저도 알죠. 이 나이에 제 인생이 더 나아지면 얼마나 나아질까요?”

그의 눈에 살짝 눈물 비슷한 게 맺히려 하자 눈이 가려워 긁는 체하며 훔쳐낸다. 물을 한 잔 마시더니 무언가 결심한 듯 말을 꺼낸다.

“그 친구에게 당분간 보지 말자고 이야기하려고요. 아무래도 우린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싼 위스키 마시는 친구랑 어울리기가 쉽지 않아요. 제가 살 수 있는 건 고작 소주인데. 그래서 그동안 진 빚도 갚을 겸, 위스키를 한 병 선물해주고 싶어서 여기 왔습니다. 이것저것 마셔보고 제 맘에 드는 위스키를 그 친구에게 주고 싶거든요. 그 친구가 보고 싶을 때면, 그 위스키 맛을 떠올릴 수도 있고요. 그 친구가 줬던 발베니라는 위스키, 아직도 맛이 기억나는 걸 보면 위스키라는 건 오래 기억되나 봐요.”

조니워커 레드 라이 피니시. [사진 김대영 제공]

조니워커 레드 라이 피니시. [사진 김대영 제공]

백바에서 위스키를 한 병 꺼내 글렌캐런 잔에 담아 그에게 건넨다.

“조니워커 레드 라이 피니쉬입니다.”

“조니워커 레드요? 이건 편의점에서도 파는 싼 위스키 아닌가요? 저는 싱글몰트를 선물하고 싶은데….”

“네, 그렇습니다만 이건 좀 다를 겁니다. 한 번 드셔보시죠.”

그가 천천히 위스키 향을 맡더니 한 모금 마신다. 눈을 감고 맛을 음미하더니 잔을 내려놓는다.

“아, 이거 괜찮네요. 뭔가 바닐라 아이스크림 같은 향이 처음에 나더니 뒤로 갈수록 은은하게 다가오는 숲의 공기 같은 맛이 나요. 이건 얼마 정도죠?”

“3만 원 초반입니다.”

“정말요? 그 정도면 충분히 선물할 수 있겠네요.”

“아마 친구도 상당히 좋아할 겁니다. 싱글몰트는 싱글몰트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블렌디드 위스키도 그 매력을 무시할 수 없거든요. 게다가 이 위스키는 ‘라이’라는 미국 위스키의 특성도 가지고 있고요.”

“정말 감사합니다.”

“친구가 좋아하는 싱글몰트가 부담된다면, 블렌디드 위스키로 다가 가보세요. 가격을 뛰어넘는 맛있는 위스키가 존재합니다. 게다가 블렌디드 위스키엔 친구가 좋아하는 싱글몰트 위스키가 여러 개 들어가 있으니까요. 지금까지 쌓아온 우정의 세월보다 앞으로 쌓아나갈 우정의 세월이 더 길잖아요? 한 번 멀어지면 다시 가까워지긴 쉽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그렇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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