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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여친과 싸우고 화해할 때 함께…달콤한 ‘위스키봉봉’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대영의 위스키 읽어주는 남자(130)

누군가와 사랑을 한다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혼자라는 외로움을 물리치고자 연애를 시작하고, 그 연애는 달콤하다. 그러나 달콤함이 사라지고 나면 쓴맛이 찾아온다. ‘결혼’이라는 법의 조임끈이 없는 한, 이 고통은 누구나 겪는다. 결국,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혼자가 되면 또다시 용기를 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다가올 고통은 망각한 채.

더워지기 시작하니 가게에 손님이 줄었다. 칵테일보다는 위스키 위주로 장사를 하다 보니, 여름에는 손님이 줄곤 했다. 올여름은 시작도 하기 전에 예고편이 너무 뜨거워 더 그런 것 같다. 시원하게 비라도 내렸으면 좋으련만.

저녁 9시 즈음, 오늘의 첫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게 조금 취한 모습이다. 옷도 어딘가 후줄근한 게 집에 있다 온 모양이다. 한 손에는 에코백을 들고 있는데 아무래도 그 안에는 술이 들어있는 것 같다.

“어서 오세요.”

“오랜만이네요. 가게는 변함이 없군요. 오늘은 손님이 한 명도 없네요?”

“네, 손님이 오늘의 첫 손님입니다.”

그가 바 테이블에 앉아 에코백에서 주섬주섬 술을 꺼낸다. 그것은 바로 위스키다.

글렌드로낙 1990 싱글캐스크 위스키.

글렌드로낙 1990 싱글캐스크 위스키.

“실례가 아니라면, 이걸 한 잔 드리고 싶은데요. 예전에 마셨을 때랑 맛이 너무 달라서 저만 그런 건지 아닌지 궁금해서요. 물론, 다른 술도 시킬 겁니다."

“글렌드로낙이군요. 그것도 px싱글캐스크. 캐스크에서 24년 숙성이면 꽤 비싼 위스키군요. 이런 좋은 위스키를 한 잔 주신다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백바에서 글렌캐런 잔을 두 개 꺼내 그의 앞에 내밀었다. 그는 위스키병의 코르크를 열고 조심스레 캐런 잔에 위스키를 담는다. 두 잔을 채운 그는 한 잔을 내 앞에, 다른 한 잔을 자기 앞으로 가져갔다.

“사실, 이 술은 여자친구와 마실 술입니다. 2년 전에 여자친구 생일 때 선물한 술이거든요. 그녀가 90년생이라 딱 생빈으로 샀죠. 가격이 비쌌지만, 매년 생일마다 이 술을 그녀와 함께 마신다면 그렇게 비싸지도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녀가 이걸 처음 마셨을 때, 얼마나 달콤해 하던지….”

“글렌드로낙 px 싱글캐스크는 여성분이 특히 좋아할 만한 술이죠. 쉐리 와인 중에도 제일 단 게 px니까요. 저는 너무 달아서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여성분은 거의 다 좋아하더라고요. 부럽습니다. 이런 위스키를 선물로 받은 그 여자친구 분이.”

“그런데요, 이번 생일은 함께 못 마실 것 같아요. 일주일 전에 크게 싸웠거든요. 제가 연애 초에는 연락도 잘하고 밤늦게까지 통화도 했었는데, 요즘엔 그런 게 뜸해졌다고 해서 말다툼을 하다가 싸움이 커졌어요. 아무래도 2년쯤 사귀고 나니까 그런 게 부족해진 것 같기도 하고…. 결혼 이야기까지 오고 간 사이인데 이런 거로 싸우니까 저로선 잘 이해를 못 하겠더라고요. 작년 같았으면 생일 이벤트 한다고 바빴을 텐데, 집에 와서 멍하니 있다 보니 이 술이 생각나서 한잔해봤지요.”

“그렇군요. 그래도 매년 같이 마시던 술이라면, 그녀도 이 술을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요?”

“네, 아마도요. 그래서 이건 한 잔만 맛보고 소주 좀 마신 다음에 전화해 미안하다고, 내일 만나자고 하려고 했는데 이 술맛이 좀 이상하게 변한 것 같더라고요. 예전에는 알코올 도수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달콤했는데, 아까 마셔보니 달콤함은 사라지고 쓴맛이 올라오더라고요. 그래서 여기 가져오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까 싶어서.”

캐런 잔에 코를 위스키 향을 맡는다. 향은 px쉐리의 달콤한 향과 함께 건포도, 초콜릿 등이 느껴진다. 한 모금 마시자 달콤함이 살아있긴 한데 뒷맛에 씁쓸함이 남는다. 아무래도 px쉐리의 달콤함에 가려져 있던 오크의 떫은맛이 시간이 지나면서 부각되기 시작한 듯하다.

“확실히 쓴맛이 남네요. 아무래도 개봉한 지 2년 정도 되니까 맛의 변화가 있겠지요. 그래도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한 px쉐리 캐스크 숙성 위스키라고 생각되는데요?"

“역시 바텐더님도 쓴맛이 느껴지는군요. 꼭 지금 그녀와 저의 관계 같네요. 달콤하기만 하던 위스키가 씁쓸해졌다는 것이. 그녀가 이 맛을 본다면 너무 실망할 것 같네요.”

“그러면 이 위스키를 저한테 맡기고 가시겠습니까? 내일 오픈 시간에 오시면 완전히 다른 무언가로 바꿔드릴게요.”

다음 날 오픈 시간이 되자마자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제의 비루한 차림새와는 달리 캐주얼한 수트 차림의 그는 표정도 한층 밝아져 있다.

“어제 집에 가는 길에 그녀에게 전화해서 용서를 빌었어요. 그랬더니 그녀도 마침 저한테 전화하려던 참이었다고 하더라고요. 둘 다 생일을 같이 보내고 싶은데, 괜한 자존심만 부렸던 거였어요. 아무 일도 아닌데 말이죠. 빨리 그 위스키를 가져가 멋진 레스토랑에서 그녀와 한잔해야겠습니다.”

그에게 위스키를 건넸다. 그런데 어제 받았을 때 비해 양은 현격히 줄어있었다. 거의 절반 이상 사라졌다.

“아니? 왜 술이 이것밖에 안 남아 있죠? 분명 이거의 두 배는 남아 있었는데…”

위스키봉봉은 위스키 특유의 맛이 느껴지다가 쓴맛이 느껴질 때쯤, 입 안에서 녹은 초콜릿 맛이 다가온다. 제아무리 쓴맛도 준비된 달콤함은 이길 수 없다. [사진 pixabay]

위스키봉봉은 위스키 특유의 맛이 느껴지다가 쓴맛이 느껴질 때쯤, 입 안에서 녹은 초콜릿 맛이 다가온다. 제아무리 쓴맛도 준비된 달콤함은 이길 수 없다. [사진 pixabay]

백바에서 검은 케이스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작은 메모를 남길 수 있는 카드까지.

“근처에 위스키봉봉을 만드는 초콜릿 가게가 있거든요. 거기에 부탁해서 만들었습니다. 어제 두고 간 위스키로요. 한입에 넣고 입 안에서 깨트려 먹으면 됩니다. 그러면 초콜릿 안에 있는 위스키가 퍼질 거예요.”

“여자친구가 초콜릿을 좋아하는데 정말 잘 됐네요! 위스키로 이런 걸 만들 수 있다는 건 생각도 못 했어요.”

“그녀에게 씁쓸해진 위스키 맛을 보여주기 싫다고 하셨죠? 위스키봉봉으로 만들면, 입안에서 깨트렸을 땐 위스키 특유의 맛이 느껴지다가 쓴맛이 느껴질 때쯤, 입 안에서 녹은 초콜릿 맛이 다가올 거예요. 그러니까 쓴맛은 느끼기 힘들 겁니다. 위스키를 감싼 달콤한 초콜릿처럼, 연애의 달콤함이 떨어지지 않도록 늘 초콜릿 같은 마음을 준비해보세요. 제아무리 쓴맛도 준비된 달콤함은 이길 수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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