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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국회의원 말에 상처입은 식당 아주머니 위로할 위스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대영의 위스키 읽어주는 남자(131)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더위가 시작됐다. 초복을 맞아 사람들은 삼계탕집을 찾고, 집집이 달린 에어컨 팬은 끊임없이 돌아간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많은 땀을 흘리는 사람이 있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제철소에서 일하는 근로자, 그리고 식당에서 일하는 누군가의 어머니가 그렇다.

땀을 뻘뻘 흘리며 출근해 바 테이블을 닦고 있는데 첫 손님이 들어온다. 우리 가게 근처에 있는 학교에 다니는 대학생인데, 몇 달 전부터 위스키에 빠져 종종 들른다.

“어서 오세요. 오늘 날씨가 상당히 덥죠?”

“네, 좀 덥네요. 시원한 맥주 한 잔 주실래요? 블랑이 좋을 것 같아요.”

한여름에 학교 식당 같은 대형 식당에서 일을 하는 것은 거의 지옥 체험에 가깝다. 밥이 나오기까지 수많은 열과 싸워야 한다. 한여름의 폭염이 아무리 거세도 밥을 짓는 곳은 못 따라간다. [사진 pixabay]

한여름에 학교 식당 같은 대형 식당에서 일을 하는 것은 거의 지옥 체험에 가깝다. 밥이 나오기까지 수많은 열과 싸워야 한다. 한여름의 폭염이 아무리 거세도 밥을 짓는 곳은 못 따라간다. [사진 pixabay]

깜빡했던 에어컨을 켜고 맥주 서버에서 블랑을 잔에 따라 그에게 건넨다. 오렌지 향이 기분 좋게 피어나 더위를 조금 사그라들게 한다.

“아~! 정말 시원하네요. 역시 여름엔 맥주가 좋은 것 같아요.”

“손님 같은 분 때문에 저희 가게가 여름에는 좀 힘들어요. 위스키를 많이 마셔주셔야 하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팔팔한 간으로 열심히 마셔드리겠습니다. 오늘은 뭘 마셔볼까요?”

가벼운 싱글몰트 위스키를 마시고 싶어하는 그에게 글렌모렌지, 클라이넬리쉬 등을 따라줬다. 그렇게 몇 잔 더 마시던 그가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바텐더님은 학교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요. 평소에 생각해보지 않아서….”

“저는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마다 꼭 아주머니들께 인사를 해요. 밥을 받을 때도, 식판을 반납할 때도. 저희 어머니도 학교 식당에서 일하셨거든요.”

그가 중학생이던 여름날이었다. 연일 최고온도를 갱신하는 폭염이 이어지던 날 학교에서 돌아와 선풍기를 켜고 누워있다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러다 누군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잠이 깼는데, 방을 나가보니 어머니였다.

“10년 뒤의 어머니 모습을 보는 것 같았어요. 땀이 말라붙어 뒤엉켜버린 머리, 얼굴은 땀으로 뒤범벅되어 있고,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어요. 표정에 생기가 하나도 없었어요. 어머니는 저를 보시고 말할 기운도 없는지 그대로 샤워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선풍기를 켜고 누우셨죠. 저녁도 안 드시고요. 그리고 아침이 오자 언제나처럼 출근하셨죠.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나 돼지 같은 뒷모습이었어요.”

손님의 어머니가 어젯밤에 TV를 보며 눈물 흘리는 모습을 봤다고 했다. 한 국회의원이 조리사에 대해 막말하는 내용이 뉴스에 나왔기 때문이다. [사진 pixabay]

손님의 어머니가 어젯밤에 TV를 보며 눈물 흘리는 모습을 봤다고 했다. 한 국회의원이 조리사에 대해 막말하는 내용이 뉴스에 나왔기 때문이다. [사진 pixabay]

한여름에 학교 식당 같은 대형 식당에서 일하는 것은 거의 지옥 체험에 가깝다. 밥이 나오기까지 수많은 열과 싸워야 한다. 한여름의 폭염이 아무리 거세도 밥을 짓는 곳은 못 따라간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땀으로 지어진 밥을 먹고 많은 사람이 힘을 낸다.

“어머니는 작년에 일이 힘들어서 관두셨어요. 관절이 너무 안 좋아 오랫동안 서서 하는 일은 못 하게 됐거든요. 그동안 저를 키워보겠다고 그렇게 아등바등 일하신 거죠. 아버지 사업이 부도난 뒤로 부랴부랴 찾은 일이셨거든요. 경력이 단절돼 다시 회사를 나가기는 힘들다고 하셨어요. 처음엔 몇 달만 하다 관둘 생각이었는데, 형편이 나아지질 않아 작년까지 하신 거죠.”

그런 어머니가 어젯밤에 TV를 보며 눈물 흘리는 모습을 봤다. 한 국회의원이 조리사에 대해 막말하는 내용이 뉴스에 나왔기 때문이다. 그 국회의원은 “솔직히 말해 조리사라는 게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돈 좀 주고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어머니는 누군가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너무 화가 났어요. 눈물 흘리는 어머니께 말도 못 걸겠더라고요. 가만히 돌아누워 주무시는 뒷모습이 얼마나 쓸쓸해 보이던지…. 한여름에 온몸에 힘이 풀려 집에 돌아오던 어머니 모습을 다시 한번 마주하는 기분이었어요.”

인버고든 1972, 43년. [사진 김대영 제공]

인버고든 1972, 43년. [사진 김대영 제공]

백바에서 위스키를 한 병 꺼낸다. 용 그림이 화려한 보틀. 캐런 잔에 담아 그에게 건넨다.

“이거 한 번 드셔보실래요?”

“보틀 라벨이 화려하네요. 어떤 위스키죠?”

“인버고든 증류소에서 만든 그레인 위스키입니다. 1972년 빈티지예요. 43년간 버번 배럴에서 숙성시켰죠.”

“네? 1972년이요? 제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이네요. 그리고 43년이라니…이거 비싼 거 아니에요?”

“그레인 위스키는 몰트위스키에 비해 싸요. 몰트로 만드는 것보다 생산량이 많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오래 숙성을 했어도 가격이 많이 비싸진 않아요.”

그가 위스키 향을 맡고 한 모금 마신 뒤 잔을 내려놓는다. 고숙성 위스키의 긴 여운을 느낀 그.

“맛있네요. 아주 부드러워요. 정말 이렇게 부드러운 위스키는 처음 마셔봐요. 입 안에 들어가자마자 사라지는 느낌이에요. 그리고 여운이 정말 좋네요. 바닐라 향이 언제까지고 이어지는 느낌이에요.”

“그레인 위스키의 특징은 그 부드러움에 있죠. 그 특징 덕분에 몰트위스키와 만나 부드러운 블렌디드 위스키를 만들어내는 거죠. 그레인 위스키가 싸고 저렴하다고 해도, 절대 싱글몰트만으로는 블렌디드 위스키의 밸런스를 만들어낼 수 없어요. 세상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값싸게 보이는 땀이 있어도 그걸 무시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땀이 있기에 우리가 있는 거니까요. 바이알에 한잔 담아드릴 테니 어머니께 드려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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