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김대영의 위스키 읽어주는 남자(131)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더위가 시작됐다. 초복을 맞아 사람들은 삼계탕집을 찾고, 집집이 달린 에어컨 팬은 끊임없이 돌아간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많은 땀을 흘리는 사람이 있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제철소에서 일하는 근로자, 그리고 식당에서 일하는 누군가의 어머니가 그렇다.
땀을 뻘뻘 흘리며 출근해 바 테이블을 닦고 있는데 첫 손님이 들어온다. 우리 가게 근처에 있는 학교에 다니는 대학생인데, 몇 달 전부터 위스키에 빠져 종종 들른다.
“어서 오세요. 오늘 날씨가 상당히 덥죠?”
“네, 좀 덥네요. 시원한 맥주 한 잔 주실래요? 블랑이 좋을 것 같아요.”
깜빡했던 에어컨을 켜고 맥주 서버에서 블랑을 잔에 따라 그에게 건넨다. 오렌지 향이 기분 좋게 피어나 더위를 조금 사그라들게 한다.
“아~! 정말 시원하네요. 역시 여름엔 맥주가 좋은 것 같아요.”
“손님 같은 분 때문에 저희 가게가 여름에는 좀 힘들어요. 위스키를 많이 마셔주셔야 하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팔팔한 간으로 열심히 마셔드리겠습니다. 오늘은 뭘 마셔볼까요?”
가벼운 싱글몰트 위스키를 마시고 싶어하는 그에게 글렌모렌지, 클라이넬리쉬 등을 따라줬다. 그렇게 몇 잔 더 마시던 그가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바텐더님은 학교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요. 평소에 생각해보지 않아서….”
“저는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마다 꼭 아주머니들께 인사를 해요. 밥을 받을 때도, 식판을 반납할 때도. 저희 어머니도 학교 식당에서 일하셨거든요.”
그가 중학생이던 여름날이었다. 연일 최고온도를 갱신하는 폭염이 이어지던 날 학교에서 돌아와 선풍기를 켜고 누워있다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러다 누군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잠이 깼는데, 방을 나가보니 어머니였다.
“10년 뒤의 어머니 모습을 보는 것 같았어요. 땀이 말라붙어 뒤엉켜버린 머리, 얼굴은 땀으로 뒤범벅되어 있고,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어요. 표정에 생기가 하나도 없었어요. 어머니는 저를 보시고 말할 기운도 없는지 그대로 샤워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선풍기를 켜고 누우셨죠. 저녁도 안 드시고요. 그리고 아침이 오자 언제나처럼 출근하셨죠.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나 돼지 같은 뒷모습이었어요.”
한여름에 학교 식당 같은 대형 식당에서 일하는 것은 거의 지옥 체험에 가깝다. 밥이 나오기까지 수많은 열과 싸워야 한다. 한여름의 폭염이 아무리 거세도 밥을 짓는 곳은 못 따라간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땀으로 지어진 밥을 먹고 많은 사람이 힘을 낸다.
“어머니는 작년에 일이 힘들어서 관두셨어요. 관절이 너무 안 좋아 오랫동안 서서 하는 일은 못 하게 됐거든요. 그동안 저를 키워보겠다고 그렇게 아등바등 일하신 거죠. 아버지 사업이 부도난 뒤로 부랴부랴 찾은 일이셨거든요. 경력이 단절돼 다시 회사를 나가기는 힘들다고 하셨어요. 처음엔 몇 달만 하다 관둘 생각이었는데, 형편이 나아지질 않아 작년까지 하신 거죠.”
그런 어머니가 어젯밤에 TV를 보며 눈물 흘리는 모습을 봤다. 한 국회의원이 조리사에 대해 막말하는 내용이 뉴스에 나왔기 때문이다. 그 국회의원은 “솔직히 말해 조리사라는 게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돈 좀 주고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어머니는 누군가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너무 화가 났어요. 눈물 흘리는 어머니께 말도 못 걸겠더라고요. 가만히 돌아누워 주무시는 뒷모습이 얼마나 쓸쓸해 보이던지…. 한여름에 온몸에 힘이 풀려 집에 돌아오던 어머니 모습을 다시 한번 마주하는 기분이었어요.”
백바에서 위스키를 한 병 꺼낸다. 용 그림이 화려한 보틀. 캐런 잔에 담아 그에게 건넨다.
“이거 한 번 드셔보실래요?”
“보틀 라벨이 화려하네요. 어떤 위스키죠?”
“인버고든 증류소에서 만든 그레인 위스키입니다. 1972년 빈티지예요. 43년간 버번 배럴에서 숙성시켰죠.”
“네? 1972년이요? 제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이네요. 그리고 43년이라니…이거 비싼 거 아니에요?”
“그레인 위스키는 몰트위스키에 비해 싸요. 몰트로 만드는 것보다 생산량이 많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오래 숙성을 했어도 가격이 많이 비싸진 않아요.”
그가 위스키 향을 맡고 한 모금 마신 뒤 잔을 내려놓는다. 고숙성 위스키의 긴 여운을 느낀 그.
“맛있네요. 아주 부드러워요. 정말 이렇게 부드러운 위스키는 처음 마셔봐요. 입 안에 들어가자마자 사라지는 느낌이에요. 그리고 여운이 정말 좋네요. 바닐라 향이 언제까지고 이어지는 느낌이에요.”
“그레인 위스키의 특징은 그 부드러움에 있죠. 그 특징 덕분에 몰트위스키와 만나 부드러운 블렌디드 위스키를 만들어내는 거죠. 그레인 위스키가 싸고 저렴하다고 해도, 절대 싱글몰트만으로는 블렌디드 위스키의 밸런스를 만들어낼 수 없어요. 세상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값싸게 보이는 땀이 있어도 그걸 무시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땀이 있기에 우리가 있는 거니까요. 바이알에 한잔 담아드릴 테니 어머니께 드려보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