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희의 맛따라기]
돔베고기는 삶은 고기를 썰어서 돔베(도마)에서 바로 따뜻하게 먹는 제주식 돼지 수육이다. 제사나 차례에 쓰려고 돼지고기를 구해 오면 필요한 분량을 보관(된장에 박아 두면 쉬 상하지 않고 2~3주 가능했다고)해 두면서 자투리 고기를 삶아 즉석에서 썰어 먹던 데서 유래했다. 마을 잔치나 초상 때 음식을 총괄하는 ‘도감(都監)’이 돼지고기를 준비하면서 시식을 겸해 자신의 돔베에 여러 부위를 썰어 맛보는 것도 돔베고기다. 고기는 멜젓이나 된장, 쉰다리로 만든 식초가 들어간 제주 초간장에 찍어 먹었다. 멜젓은 봄철 제주 앞바다 대멸치로 담근 젓갈이고 쉰다리는 쉰 밥으로 만드는 술이다. 제주에는 젓새우가 안 나서 새우젓이 없었다.
돼지고기 수육 전문점 ‘제주도감’
따로 삶은 여섯 부위 따뜻한 수육
돔베에 올려 이색 소스 찍어 먹어
혼례 날 신부상에 올린 접짝뼈국
메밀간장기름국수·돼지설렁탕도
도감이 음식 소외되는 사람 없게 배분
12도체는 도감의 지휘에 따라 부위별로 특성에 맞게 따로 삶는다. 삶는 방법에 따라 고기 맛이 다르기 때문이다. 뜸들이는 시간을 조절하고, 삶은 고기를 건져 소금과 식초를 탄 찬물을 끼얹어 밑간과 소독을 한다. 표면 열기를 빨리 식혀 육즙이 겉으로 흐르는 걸 줄이는 효과도 있다. 찬물을 끼얹어도 내열은 천천히 식는다. 그러면 고기가 빨리 마르지 않아 촉촉한 질감과 맛이 살아 있다. 이 고기를 식혀서 괴기반을 차린다. 삶는 물에는 돼지 한 마리에 된장만 두 숟갈 정도 푼다.
종일 고기를 삶은 국물은 진국이 된다. 여기에 다진 돼지 내장, 몸(모자반)을 넣고 밤새 끓이면 ‘몸국’이 된다. 국물에 메밀가루를 걸쭉하게 풀고 잘게 썬 신김치를 양념장으로 올려 상에 낸다.
돔베고기와 괴기반으로 정착한 제주의 돼지고기 음식문화는 이 화산섬에서 돼지를 사육한 이래 오래도록 쌓이고 다져진 방식일 터이다. 이 뿌리 깊은 전통도 이제는 잊혀지거나 변형돼 아주 부분적으로만 남아 있다. 기름기를 선호하는 식성의 변화, 불로 직접 가열해 기름 맛을 극대화하는 조리법의 압도적 확산 때문이다. 그 결과 돼지고기 소비는 부위와 조리법이 삼겹살 구이 쪽으로 극단적 편향이 심해지고 있다.
이런 대세에 맞서 전통 제주 방식의 돼지고기 음식을 파는 음식점이 두 달 전 제주시에서 문을 열었다. 상호가 ‘제주도감’이다. 제주 전통사회 ‘도감’들의 솜씨와 정신을 되살려 ‘제주 돼지고기를 가장 제주답게 맛볼 수 있는’ 집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은 작명이다. 이를 위해 제주 향토음식 명인 1호인 어머니 김지순(85) 여사를 도와 ‘낭푼밥상’을 운영하는 양용진(56) 제주향토음식보전연구원장이 요리를 맡고, 돼지 1만2000두를 사육하면서 가공·유통까지 하는 만덕유통이 고기와 자본을 대고, 165.3㏊(50만 평) 넘는 메밀 농사를 짓는 농업회사법인 ‘오라’가 메밀을 공급한다. 여기에 20대 여성들로 구성된 마케팅과 외식업 경영 전문회사 ‘비바리즈’가 힘을 모았다.
양용진 원장 “솖은 돗괴기 먹으래 옵서”
접짝뼈국은 혼례 날 신부상에만 올려주던 국이다. 앞다리 사이의 가슴뼈를 제주 말로 접짝뼈(또는 우대갈비)라 하는데, 1~3번 갈빗대를 포함해 자른다. 쇄골 아래 붙어있어 짧고 두 손바닥만큼 나오는 부위다. 족두리 쓰고 혼례복 입은 신부가 뼈를 들고 뜯을 수는 없으니 수저로 떠먹을 수 있는 길이로 자르고, 도톰하게 썬 무를 넣어 고기가 무르도록 끓이다가 마지막에 메밀가루를 풀어 국물이 걸쭉하게 한다. 느끼하거나 끈적일 것 같은데 실제는 시원하고 부드럽다.
돼지설렁탕은 서울의 ‘옥동식’이나 ‘광화문국밥’의 맑은 돼지국밥을 보면서 양 원장이 오래 생각해 온, 돼지고기로 서울식 설렁탕처럼 끓이는 음식을 세상에 처음 내놓는 메뉴다. 뽀얀 국물 색이나 맛이 소고기 설렁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본질이 같은 고깃국이라 맛이 비슷할 거라는 게 양 원장 생각이다. 선입감과 달리 잡내가 거의 없다. 맛이 깔끔하고 감칠맛은 좋다. 뼈와 고기의 신선도가 비법이라 한다. 그런데 돼지 대가리 뼈가 안 들어가면 국물 맛이 제대로 나오지 않더란다.
양 원장에게 요즘 마음속 말을 제주어로 해 보라 했다. “제주 사름덜 잔치 때 먹어난 솖은 돗괴기 먹으래 옵서”라 한다. ‘제주 사람들 잔치 때 먹던 삶은 돼지고기 맛 좀 보세요’라는 말이다.
전직 신문기자. 기자 시절 먹고 마시고 여행하기를 본업 다음으로 열심히 했다. 2018년 처음 무소속이 돼 자연으로 가는 자유인을 꿈꾸는 자칭 ‘자자처사(自自處士)’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