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명동예술극장에서 국내 초연한 연극 ‘그을린 사랑’의 마지막 대사는 오랫동안 작곡가 정재일(39)의 마음을 붙들었다. 음악감독으로 참여하면서 자신과 그 주위를 둘러싼 것들을 돌아보면서 되새기게 된 “대사이자 태도, 감정”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11년 만에 정규 3집 ‘시편’을 들고 돌아온 그는 서면 인터뷰에서 “아마 그 지점이 이 음악들을 앨범으로 기록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인 것 같다”고 밝혔다.
‘시편’도 무대에서 시작된 앨범이다. 지난해 5ㆍ18 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식에서 미디어 아티스트 장민승과 함께 25분짜리 헌정 영상 ‘내 정은 청산이오’를 만든 이들은 11월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100분으로 확장한 후속작 ‘둥글고 둥글게’를 선보였다. 5ㆍ18 민주화운동부터 1988년 서울올림픽까지 당시 한국을 담은 사진과 영상, 문서를 아카이빙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장 작가는 “간곡하면서도 탄원하는 것 같기도 한” 시편을 떠올렸다.
11년 만에 정규 3집 ‘시편’으로 돌아와
5·18 민주화운동 헌정 영상에서 출발
현악부터 구음까지 다양한 표현 돋보여
“100분 달하는 길이, 또다른 생명력 가져”
하여 이번 앨범을 듣는 것은 적잖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합창 아카펠라와 구음, 일렉트로닉 음향, 현악 앙상블로 구성된 21곡이 웅장하게 펼쳐지면서 새로운 체험을 선사한다. 구약성서 시편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한 라틴어 합창이 이어지면서 무언가를 향한 간구와 슬픔을 이기지 못해 탄식이 뒤섞여 온몸을 휘감는다. 특히 시편 89장 48절 ‘기억하소서, 제 인생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당신께서 모든 사람을 얼마나 헛되이 창조하셨는지를’이라는 구절이 와 닿았다고.
1999년 긱스로 데뷔한 정재일은 박효신·김동률·패닉의 작곡가로 이름을 알렸다. 영화 ‘기생충’과 ‘옥자’를 비롯해 연극ㆍ뮤지컬ㆍ국악ㆍ발레 등 다양한 장르와 협업하는 만능 뮤지션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협업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 누구냐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영화는 장면과 감독의 의도, 무용은 안무와 무용수의 의도가 분명하죠. 그 지점에 다가가기 위해 끊임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장르마다 섬세한 다른 어법이 있기는 하지만 큰 줄기는 같거든요. 스펙트럼이 넓지 않아 제가 잘해낼 수 있을까, 과연 결이 맞을까 고민할 뿐 좋은 기회가 있으면 언제든 새로운 작업에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