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식물이 나를 돌본다, 베란다 텃밭

중앙일보

입력 2020.10.0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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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김정아의 식(植)세계 이야기(4)

손바닥만 한 햇빛만 있어도 실내에서 봄 가을에 상추나 새싹채소를 재배하는 건 어렵지 않다. 직접 키운 채소는 농약을 쓰지 않으니 사서 먹는 채소보다 안전한데 심지어 더 맛있다.
 
내가 식물의 매력을 발견한 건 이국적인 몬스테라를 보면서였지만, 식물의 속성과 흙에 대해 배우게 된 건 베란다 텃밭을 하면서부터다.
 
출발은 규칙적 일상을 회복해보자는 생각에서 시작됐다. 매일 출퇴근하던 생활리듬이 깨지자 일상의 리듬도 흐트러졌기 때문. 베란다 텃밭을 가꾸면 최소한 아침에 물 주느라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고, 식물이 커가는 걸 보면 기분도 전환하고 싶었다.
 
4월 초 인터넷을 검색해 키우고 싶으면서도 잘 자랄만한 채소를 골랐다. 청상추·적상추 로메인상추 등 상추 종류와 루꼴라· 바질 등 허브, 깻잎, 부추 그리고 딸기와 방울토마토를 선택했다. 


상추와 로메인 모종들. 한 달 정도 지나면서부터 우리집 식탁을 건강하게 만들어줬다. [사진 김정아]

 
실내에서 키울 채소를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한 변수는 광량. 우리 집은 베란다가 서향에 있고, 천장이 반투명 아크릴이라 실내 텃밭에 필요한 광량 확보는 어렵지 않아 보였다.

 
실내 텃밭은 수직으로 햇빛을 받을 수 있는 노지나 어느 정도 빛이 들어오는 온실에 비해 광량 조건이 불리하다. 햇볕을 잘 받아야 제대로 자라는 열매채소나 감자·고구마 같은 뿌리 식물 보다는 적은 광량으로도 잘 자라는 잎채소 키우는 게 성공 확률이 높다. 어려운 채소를 선택해 사소한 일로 좌절을 맛볼 필요는 없다.
 

햇빛 적응성에 따른 실내텃밭 식물 분류표 [자료 농사로]

 
채소 종류와 재배 규모를 정하고 흙과 텃밭용 사각 화분을 몇 개 샀다. 내공이 있었더라면 화분은 굳이 안 사고 깊이가 있는 스티로폼 박스나 페트병을 재활용했을 것이다. 
 
흙(상토)을 어디 가서 퍼올지 걱정할 필요도 없다. 식물 성장에 필요한 여러 성분을 적절히 혼합, 무균처리한 다양한 상토가 작게는 5L부터 50L 포장으로 시중에 나와 있다. 시판 상토는 야자수를 가공한 코코피트와 펄라이트(용암이 냉각되어 만들어진 진주암을 고온가공한 소재로 흙의 배수를 위해 많이 사용하는 소재), 뿌리 내는 데 도움이 되는 질석, 비료 역할을 하는 지렁이분변토 등 재료를 적정비율로 혼합해 자연토양보다 낫다는 평가다. 가격은 50L 1만원 내외로 저렴한 편.
 
실내 텃밭에서도 상추는 대개 잘 자란다. 모 하나에 20cm³ 정도 공간의 흙과 물, 햇빛이면 비료를 주지 않아도 한 달 반 정도면 먹을 만큼 큰다. 4월 중순 모종으로 심은 상추 12포기 로메인 6포기 덕분에 한 석 달 정도는 상추는 한 번도 사 먹은 적이 없다. 집에서 키운 상추를 따서 바로 먹을 때의 그 맛은 사 먹는 상추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맛있다. 아삭한 로메인과 피자에 많이 올리는 루꼴라, 바질을 키운 덕분에 건강한 샐러드도 매일 먹을 수 있었다.
 

텃밭에서 계속 나오는 채소와 방울토마토등으로 매일 샐러드를 먹을 수 있었다. [사진 김정아]

 
가장 흥미로운 건 역시 열매채소의 수확. 딸기는 열매가 맺기 전 초기에 뿌리파리 대응이 늦어져 그다지 많은 열매가 얻지 못했다.
 
하지만 딸기보다 더 오랜 기간 자란 방울토마토는 나의 베란다 텃밭에서 가장 큰 성취감을 안겨줬다. 키가 10cm 남짓한 작은 모종에서 시작한 11그루의 방울토마토는 2m 이상 자라면서 꽃대를 7단에서 10단 가까이 냈다. 과산화수소수 희석액과 날벌레트랩의 동시 공격으로 뿌리파리를 잘 막아내면서 열매로 이어진 것이 많아 수확이 좋았다.
 

10cm 남짓한 모종으로 왔던 방울토마토가 이제 베란다 천장에 닿을만큼 커져 시들어가면서도 계속 꽃피고 열매를 맺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자랐다. [사진 김정아]

 
방울토마토의 노란 꽃이 지면서 작은 연둣빛 열매가 맺히고 그 열매가 커져 빨갛게 물드는 걸 보는 건 아주 색다르고 약간의 감동까지 느껴지는 경험이었다. 매일 베란다에서 손바닥 가득 방울토마토를 수확하고, 체리인지 방울토마토인지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달콤한 맛을 즐기다 보면, 미니 과수원이라도 가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방울토마토는 초여름부터 그렇게 많은 열매를 줬는데도 9월부터 다시 꽃이 피고 열매가 열려 빨갛게 익어가고 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도 같은 방울토마토를 나는 내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또 키울 것이다.
 
『사피엔스』를 통해 인간의 농업혁명을 덫이라 폄하한 유발 하라리는 ‘한 줌의 식물 종, 밀과 쌀 감자가 호모사피엔스를 길들였지, 호모사피엔스가 이들을 길들인 게 아니라’고 설파했었다. 이제 그 말에 공감한다. 방울토마토가 나를 지배한다.
 
사진 5] 방울토마토 열매 열린 사진, 수확 사진

 

꽃이 진 자리에 눈꼽만한 열매가 맺혀 빨갛게 익어가는 모습을 보는건 나름 흥미로운 구경거리이기도 하다. [사진 김정아]

 
9월 들어 몇 가지 잎채소를 씨앗부터 심었다. 씨앗 파종을 쉽게 할 수 있는 지피펠렛과 파종트레이에 뿌리 나는 데 효과적인 질석을 이용해 발아시킨 후 상토로 옮겨 심었다.

 
이번엔 실내 텃밭에서 한 달 정도면 수확한다는 적환무, 로메인상추, 다채, 버터헤드상추와 적치마상추를 선택했다.

 

9월초 파종트레이와 지피펠렛에 파종한 몇가지 상추와 적환무. 봄보단 성장이 느리지만 한달새 이렇게 자랐다. [사진 김정아]

 
초기 성장기에 태풍으로 햇빛이 부족했고 바람도 많이 불어 9월 2일에 심은 채소가 아직 충분히 크지 않았다. 하지만 모래알만 한 씨앗에서 푸릇푸릇한 초록빛 새싹이 나오고 하루하루 커가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큰 정서적 위로가 되는지. 베란다 텃밭을 하면서 나는 알았다. 내가 채소를 돌보는 게 아니라 채소가 나를 돌보고 있다는 것을.

 
전 금융투자협회 상무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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