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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식중독에 빠진 식천지의 식집사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정아의 식(植)세계 이야기(1) 

행복하고 자유롭게 사는 방법을 찾고 있다. 과학소설과 음악, 영화, 근육운동이 취미인 냥집사, 동물애호가였지만 최근 식물의 세계에 푹 빠져 있다. 먹는 식물 키우기로 시작, 지금은 꽃보다 예쁜 잎을 가진 희귀식물, 정글플랜츠 등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이후 전 세계적으로 관심이 높아진 가드닝, 유기농 텃밭 채소 재배, 공기정화식물 플랜테리어…. 이제는 재테크 대상으로까지 번진 식물 세상과 식물에 빠진 사람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편집자〉

식천지를 아세요? 이 무슨 ‘도를 아십니까’ 같은 소리일까요. 신흥종교도, 미식동호회도 아닙니다. 요즘 식물에 빠진 사람은 자신을 식천지 신도라 부릅니다. 집사 같은 자세로 고양이 강아지를 돌보듯, 식집사로 반려식물 시중을 듭니다. 햇빛이 부족한 실내 식물에 식물전용등을 마련해주는 건 기본입니다. 식물이 과습으로 초록별로 갈까 봐(죽을까 봐) 서큘레이터를 식물에게 양보하는 건 식집사 사이에선 흔한 일이죠.

코로나19 시국에 집에서 하는 것이 재평가되면서 가드닝, 반려식물 키우기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특히 인기가 높은 안스리움속, 필로덴드론속 식물은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일 년 사이 5~6배 이상 가격이 치솟았죠.

하얀 무늬라는 변이가 생긴 몬스테라알보바리에가타라는 식물은 무늬 잎 2~3장에 100만원을 넘어도 구하지 못해 애타는 식집사가 이곳저곳 커뮤니티에 넘쳐납니다. 희귀식물 판매로 유명한 셀러가 온실에서 식물을 판매하는 날에는 개방시간이 오전 10시쯤이라도 새벽부터 줄을 섭니다.

필로덴드론 베루코썸(좌), 안스리움 크리스탈호프(우). 필자가 왕복 120km를 운전해 구해온 위시 식물이다. [사진 김정아]

필로덴드론 베루코썸(좌), 안스리움 크리스탈호프(우). 필자가 왕복 120km를 운전해 구해온 위시 식물이다. [사진 김정아]

여의도에서 17년 일하면서 벚꽃조차 안 쳐다보던 내가 어쩌다 식세계에 들어왔을까요. 올봄 사회생활 이후 처음으로 긴 휴식시간을 갖게 됐습니다. 워낙 취미도 많고, 만성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삶이라 갑자기 찾아온 긴 휴식이 즐거울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 덕분에 계획한 유럽 여행은 취소되고, 30년간의 출퇴근 생활이 사라지니 수면 리듬은 망가지고 몸과 마음에 모두 이상 징후가 나타나더군요.

먼저 일상을 회복하자는 차원에서 상추, 방울토마토, 딸기, 허브를 키우는 베란다 텃밭을 시작했죠. 식물에 물주려면 아침 일찍 일어나고 그러려면 밤에 자야 하고, 베란다에서 왔다 갔다 하는 운동은 할 수 있으니.

베란다 텃밭. [사진 김정아]

베란다 텃밭. [사진 김정아]

베란다 텃밭을 하면서 손가락만 한 모종들이 자라 상추가 되고 깻잎이 되고 먹을 만한 루꼴라 바질이 되니 식물 키우는 게 즐거워졌습니다. 집은 꾸미되 공기정화도 기대할 수 있는 ‘플랜테리어(planterior)’ 차원에서 테이블야자, 보스톤고사리, 몬스테라 같은 흔한 공기정화 식물을 몇 개 들였습니다.

우리집 창가 식물. [사진 김정아]

우리집 창가 식물. [사진 김정아]

인스타를 오래 했던 저는, 베란다 가드닝 사진을 종종 인스타에 올립니다. 사진을 올리면서 #gardening #plant #planterior 같은 해시태그를 눌러 다른 사람의 가드닝 사진, 외국 계정의 가드닝 사진도 구경하죠.

어느 날, 별생각 없이 #monstera 해시태그를 눌렀다가 변종 몬스테라 사진을 보게 됩니다. 학명 몬스테라 보르시지아나 알보 바리에가타 #monsteraborsigianaalbovariegata 라는 식물이죠. 흔히 알보몬으로 부릅니다.

인스타그램에서 monstera, monsteraborsigianaalbovariegata 해시태그로 찾아본 사진.

인스타그램에서 monstera, monsteraborsigianaalbovariegata 해시태그로 찾아본 사진.

이 식물을 사고 싶었습니다. 멋지게 찢어진 초록 잎에 하얀 무늬가 반달처럼 있거나 멋지게 펼쳐진 이 변종 몬스테라의 아름다움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 겁니다. 인터넷을 헤집고 다녀도 알보몬스테라를 살 수 없었습니다. 드물게 한 두 개 사이트에 올라온 건 전부 동났고, 드문드문 희귀식물 전문업체나 개인이 분양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때부터 인스타와 블로그에서 식물을 주로 올리는 계정을 팔로우하고, 식물 커뮤니티 카페에도 가입합니다.

알고 보니 알보몬처럼 뜻밖의 무늬를 가진 식물, 꽃보다 더 예쁜 잎을 자랑하는 식물, 정글플랜츠의 매력에 이미 빠져있는 ‘식(植)중독’ 식물러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처럼 나도, 식세계라는 개미지옥에 빠집니다.

꽃보다 예쁜 잎 칼라디움. [사진 김정아]

꽃보다 예쁜 잎 칼라디움. [사진 김정아]

식물 같지 않은 벨벳 같은 감촉과 뚜렷한 잎맥을 자랑하는 안스리움 속 식물이나 필로덴드론 속 식물은 가격이 올라가도 수요자가 계속 대기 중인 공급자 시장이 돼버렸습니다. 동남아산 등의 안스리움과 필로덴드론은 해충이 발견돼 올해 수입이 중단된 데다, 코로나바이러스로 항공편까지 축소돼 공급이 급감하면서 국내 화훼농장과 개인 컬렉터의 번식이 주요 공급원이 됐기 때문이죠. 반면 전 세계적으로 가드닝이나 플랜테리어 수요는 늘고 있으니 공급이 줄어든 희귀식물의 가격 폭등은 예상된 수순이었죠. 코로나바이러스가 일부 식물의 몸값을 이렇게까지 높일 줄 누가 알았을까요.

식물 커뮤니티에는 저처럼 식중독에 빠진 사람이 많습니다. 휴가로 시골에 놀러 가 밭에 토란이 보이면 토란잎에 무늬가 없나 들여다봅니다. 실제로 토란의 변종인 무늬토란은 요즘 식물러에게 매우 인기 있는 식물입니다. 아직 8월인데 늦가을부터 기온이 내려가고 습도가 떨어지면 열대 식물이 상할 수 있어 식물 온실용으로 이케아 유리장은 인기품목입니다.

커뮤니티 내에서는 희귀 식물 판매 정보가 '식친' 사이에 가장 핫한 정보이고, 인기 식물은 식물러의 '광클'로 순식간에 동납니다. 느린 손가락과 와이파이 속도 탓에 원하는 식물을 갖지 못한 식친을 위로하기도 하죠. 문제는 원하는 식물을 하나하나 채워도, 못 보던 예쁘고 멋진 식물은 계속 나타난다는 겁니다. 욕망의 다단계죠. 그래서 식집사는 자신을 식천지 신도로 부릅니다.

반려식물 신드롬은 그냥 지나가는 현상일까요? 앞으로 코로나바이러스 백신이 상용화해 재택 인구와 재택 시간이 줄고 해외여행이 다시 활발해지고 항공편수도 늘어나면 반려식물 수요는 줄어들 수 있죠. 하지만 이미 홈 가드닝을 통해 식물로부터 기쁨과 위로를 받으면서 자발적으로 식천지 신도가 된 식집사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게 아닐까요?

전 금융투자협회 상무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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