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청년'이 100세 시대 후배들에게...서예가 하석 박원규

중앙일보

입력 2020.09.22 10:00

수정 2020.09.24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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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그림이 아니라 글씨다. 붉은색 갑골문체로 쓴 배 주(舟)자와 동파문자체로 쓴 수레 거(車)자로 완성한 작품 '주거(舟車)'. '배와 수레 어디서든 나루에 안닿을까'라는 내용의 시가 수레 아래 공간에 쓰여 있다. 하석 박원규 선생은 "이 작품을 쓰며 20~30대 청년들을 염두에 두었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하하옹치언(何何翁卮言)'. '하하옹이 늘어놓는 횡설수설'이란 뜻으로,하하옹한글초성체로 썼다 [JCC아트센터]

한국 서단의 거목 하석 박원규(73)의 개인전 '하하옹치언(何何翁卮言)'을 보러 간 자리에 남자 노인 '옹'(翁)은 없었다. 청바지 위에 초록색 티셔츠, 블랙 라이더 가죽 재킷을 걸치고 운동화를 신은 70대 청년이 거기 있었다. 일본의 건축 거장 안도 다다오(79)가 설계한 서울 혜화동  JCC아트센터(관장 안순모) 건물 1~4층을 36점의 작품으로 채운 서예가가 바로 그였다. 대담하게 설계된 안도 다다오의 공간에 응수하듯이 36점의 작품을 전시장에 풀어놓은 그는 "이 공간에 꼭 맞는 작품을 구상하기 위해 열다섯 번 이상 이 곳을 찾았다"고 했다.    
 
이 전시를 볼 관람객들은 일단 서예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선입견부터 버려야 할 것 같다. 그림 같기도, 글씨 같기도 한 작품들은 오히려 현대 미술에 가까워 보인다.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평생 공부를 해온 그의 붓은 갑골문체(甲骨文體), 동파문자체(東巴文字體), 금문체(金文體), 한간체, 광개토대왕비체(廣開土大王碑體)를 넘나들며 서예의 참멋을 보여준다. 

JCC아트센터 '하하옹치언' 서예전
글씨, 한문 공부 57년 내공 펼쳐
"좋아하는 서예 위해 운동은 필수"

탄성을 더욱 자아내는 것은 그가 쓴 글자 하나하나가 전하는 내용이다. 대학 2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사서오경을 섭렵해온 그는 "50년 이상 (한문) 책을 읽으면서 나 스스로 '캐낸' 글로만 글씨를 썼다.  20·30대 청년들과 퇴직을 앞둔 중장년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여기에 다 담았다"고 말했다. 

하석 박원규 선생이 2시간30분 동안 써내려간 '산거지'. 길이 12m의 대작이다. [JCC미술관]

이번 전시작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가로 길이 12m, 세로 2m40㎝의 대작 '산거지(山居志·산에 사는 뜻)'다. 한 달 전 전시장 바닥에 종이를 펼치고 붓 다섯 자루를 써가며 완성했다. 
 
"내 집은 깊은 산속에 있네/ 봄여름이 바뀔 적마다 섬돌에는 푸른 이끼, 길에는 떨어진 꽃/그러나 날 찾는 이 없네"로 시작하는 글은 "(세상의 명성과 잇속을 낚아채려 급히 달리지 말고) 스스로를 잘 기르라"는 조언을 담고 있다. 중장년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로, '100세 시대, 이모작의 삶을 준비하라'는 뜻을 담았다. 
 
"갑골문체, 금문체, 한간체, 광개토대왕비체 등 온갖 서체를 손 가는 대로 썼다"는 의미에서 그는 이 작품의 서체를 "하하옹수수체"라 했다. 그는 "한자리서 써내려 가는 데 2시간30분이 걸렸지만, 385자에 달하는 글자들을 각각 어떤 체로 쓸지 하나하나 고르고 연습하고 준비하는 데 6개월 이상 걸렸다"고 했다. 전시장 한켠에 자리한 그 많은 연구수첩이 그 쉼없는 공부의 생생한 증거물이다.


하석 박원규 선생의 연구수첩. 글자 하나를 가지고 씨름한 흔적이 보인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하석 박원규가 하하옹신수체로 쓴 '산우·야천'. [JCC아트센터]

머잖아 퇴직할 사람들을 위해 쓴 글도 있다. 광개토대왕비체로 쓴 '관기소불위(觀其所不爲)'다. 그가『여씨춘추·논인』에서 발췌한 이 글은 '그 사람이 하지 않는 것을 관찰한다'는 뜻. 그는 "사람의 참모습을 보려면 빈궁해졌을 때 그가 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아야 한다"며 "중장년들은 현직을 떠난 뒤 하지 않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염두에 둬야 한다"고 했다.  
 
20·30 청년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도 담았다. 붉은색 갑골문체로 배 주(舟)자와 오색 상형문자인 동파문자체로 수레 거(車)를 써서 수레와 배의 형태가 그대로 보이는 '주거(舟車)'다. 이 작품에 그는 중국 5대10국 시대의 재상 풍도(馮道)가 쓴 시 ‘우작’을 적었다. "위험한 때 정신을 갈팡질팡하지 마라/앞길에도 종종 기회가 있으리니/(…)/배와 수레 어디서든 나루에 안 닿을까"라는 내용이다. 그는 "지금 아무리 힘들어도 한탄만 하지 말고 어떤 일이든 세상에 좋은 일을 하라. 언젠가는 세상이 너를 써줄 날이 있다'는 뜻"이라고 했다. 

광개토대왕비체로 쓴 '관기소불위'. [JCC아트센터]

 

광개토대왕비체로 쓴 '낙천안명'. [사진 JCC아트센터]

광개토대왕비체로 쓴 '낙천안명(樂天安命)', 한간체로 쓴 '무심(亡心)'에서도 그가 자신에게 다짐하던 말, 삶에 대한 철학이 읽힌다. 낙천안명은 '하늘의 명을 즐기고 편안히 여기다'라는 뜻이고, 무심은 '삿된 생각에서 벗어난 진실한 마음의 경지'를 말한다. 한국사회에 던지는 쓴소리도 담았다. 대전체로 쓴 '칩(馽)'자다. '말의 다리를 끈으로 얽어맨다'는 데서 유래한 이 글자를 통해 그는 "사회가 인재들의 뒷다리를 잡지 말고 그들이 기량을 맘껏 발휘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했다.  
 
독특한 전시 제목 '하하옹치언'은 오래전부터 그가 자신을 '하하옹'이라 부르는 데서 따왔다. "제 호가 '하석', 어찌 ‘하(何)’ 자에 돌 ‘석(石)’ 자를 씁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글자가 ‘어찌 하’에요. 학문이든 예술이든 모든 것은 의문에서 시작하니까요." 그러면서 '하하 존사(尊師)' 얘기를 이어갔다. 
 
"옛날에 그 어찌 하 자 두 자를 쓴, ‘하하 존사’라고 하는 분이 계셨다고 해요. 사람들이 뭐라고 쓴소리를 해도 하하 웃기만 해서 그분을 ‘하하 존사(尊師)'라고 했답니다. 이젠 저도 누가 좀 고깝게 한다고 화내고 그럴 나이가 아니라는 생각에서 저를 '하하옹'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죠. 치언은 ‘술 한잔하고 무심히 늘어놓는 말’이니, 이번 전시는 '하하옹이 늘어놓는 횡설수설'인 셈입니다(웃음)."
 

하석 박원규 선생의 유머와 재치가 돋보이는 작품 '음주'. 동파문자로 썼다. [JCC아트센터]

하석 박원규가 쓴 '건곤'. 현대 추상화 작품 같아 보인다. [JCC아트센터]

전북 김제 출신인 그는 고교 시절 석당 고석봉 선생이 쓴 ‘인지위덕(忍之爲德)’이라는 현판에 매료돼 글씨와 전각을 배우기 시작했다. 전북대 법대 2학년 때부터 글을 잘 쓰기 위해 한학의 대가 긍둔 송창 선생으로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고 이후 월당 홍진표, 강암 송성용, 독옹 이대목(대만), 지산 장재한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서예의 90%는 공부, 10%가 운필(붓질)"이라는 그는 "글씨를 곱게 써야 하는 게 서예가 아니다. 자기가 드러나도록 써야 한다. 글씨는 그 사람의 인생관, 심성까지 다 드러내는 것"이라고 했다. 
 

'하하옹치언' 전시장에서 만난 하석 박원규 선생. 길이 6m의 '책' 자 앞에 앉았다. [이은주 기자]

그로부터 서예 얘기만 들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커피가 좋아 바리스타 과정까지 마친 그는 커피 전문가이고, 맛있는 세계 맥주에 관한 얘기로 밤새울 정도로 할 얘기가 많다. 20대부터 전주 국악원을 다녀 1980년대 중반 전국 고수대회 결선 3위까지 올라갔고, 골프와 수영, 스쿼시 실력은 프로급이다.   
 
60년 가까이 공부하며 지칠 줄 모르고 즐기며 작업하는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 걸까. 그는 "추사 선생을 극복하지 않고 나는 역사에 남을 수 없다’는 생각과 각오로 매일 나를 단련해왔다"고 답했다. 이어 "내 별명이 '새나라의 어린이'다. 새벽 3시30분~4시에 일어나고, 매일 빠짐없이 운동한다. 좋아하는 일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체력관리는 필수"라고 말했다. 전시는 12월 2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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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