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칠십은 자고로 드문데 나는 팔십이 넘었다. 사람은 늙으면 뒷일을 생각한다. 중국에는 '관 뚜껑을 덮고 (그 사람의 시비와 공과를) 평가한다'(盖棺定論)는 옛말이 있다. 나는 아직 관 뚜껑을 덮지 않았지만 금방이다. 어쨌든 공과를 평가하겠지.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늘만이 알 것이다."
지난 9일 극단적 선택으로 갑자기 떠난 박원순 전 서울시장에 대한 '추모의 시간'이 지나고 '진실의 시간'이 도래했다. 이제 냉정한 평가를 시작할 때다.
사실 '국내 최초 성희롱 사건 승소 변호사'이자 '민선 최초 3선 서울 시장'이 4년간이나 지속해서 여성 비서를 성적으로 괴롭혔다는 피해자의 주장만으로도 메가톤급 충격이다.
무엇보다 박 전 시장의 언행 불일치가 개탄스럽다. 그는 서울 시청(市廳)을 '시민청'(聽)으로 바꾸고 건물 입구에 "시민의 마음이 열릴 때까지 귀를 열겠습니다"라는 문구를 내걸었다. 하지만 성추행 피해자가 진실 규명과 권리 구제를 호소하자 곧바로 귀를 닫아버렸다.
범죄의 진상을 덮으려 했다는 의혹마저 하나둘 폭로되고 있다. 피해자의 고소 이전에 박 전 시장이 고소 내용을 인지했고, 경찰청과 청와대에 보고되는 과정에서 비밀이 누설돼 2차 피해를 유발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 전 시장은 재임 중에 '젠더 특별보좌관'(3급) '여성 권익 담당관'(4급) '젠더 사무관'(5급) '젠더 담당관' 등 제도적 장치를 도입했다고 대대적으로 떠벌렸지만, 실전에선 무용지물이었다. 2015년 유엔 공공행정 대상을 받은 '여성 안심 특별시'는 비웃음 대상이 됐다.
사실 박 전 시장만의 문제는 아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비서 성폭행 범죄,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여직원 성추행 사건에서 보듯 단체장들의 성범죄가 잇따르고 있다. 그 배경에는 구조적 원인이 있다.
광역 시·도 지사와 기초 시·군·구청장 등 민선 단체장들은 상상 이상의 권력을 휘두른다. 대통령이 황제 같은 권력자라면 단체장은 제후국 왕에 빗댈 정도다. 공무원들의 승진과 보직 인사에서 생살여탈권을 휘두른다.
단체장의 측근인 정무직 '어공'(어쩌다 공무원) 위세에 '늘공'(늘 공무원)은 엎드린다. 수천억~수십조원의 예산을 쓰면서 민간부문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단체장의 눈에 나면 지역 건설업체와 자영업자는 금방 망한다는 말이 공공연한 비밀이다. 재벌기업 갑질 횡포를 능가한다.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단체장을 견제할 수단이 마땅히 없다. 의회가 있다지만, 단체장과 의원을 전국 동시 선거로 뽑으면서 특정 정당이 석권하는 쏠림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예컨대 서울시 의회는 2018년 선거에서 110석 중 민주당이 102석을 싹쓸이했다. 부산의 경우 민주당 소속 오거돈이 2018년 당선될 때 시의회 권력도 사상 처음 민주당으로 넘어갔다. 47명 중 41명을 민주당이 독식했다.
같은 정당끼리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경우가 많아 한통속이 되면 의회의 견제 기능은 실종된다.
현지 사정에 밝은 인사는 "같은 정당 소속 단체장이 추진하는 추경 예산안 등 각종 정책은 견제 없이 일사천리로 처리된다"고 전했다. '소왕국'의 절대 권력은 반드시 부패하고 그 피해는 국민 부담이다.
1995년 6월 제1회 전국 동시 지방선거를 시작으로 민선 단체장 시대가 다시 열렸고 25년이 흘렀다. 결국 해법은 민주적 견제와 균형 시스템 마련이다. 지금처럼 방치하면 지방 권력은 공룡 단계를 넘어 괴물로 변신해 주민을 해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