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이자 최악의 백신 사업.’
[알지RG]
◇스페인 독감 악몽이 사태 키워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조사에 나선 결과 숨진 병사의 몸에서 당시로선 신종인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검출됐습니다. 돼지를 매개로 한 이른바 돼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였죠.
많은 사람이 부모 세대가 겪은 스페인독감의 악몽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 정부는 그해 가을부터 대유행이 일어날 것으로 예측, 대응책 마련을 서둘렀습니다. 1976년 3월 22일 공중보건 당국은 백악관에 대규모 백신사업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이틀 뒤 포드 대통령은 2억명 이상의 전 국민을 대상으로 백신 접종을 하겠다고 발표합니다.
◇실제 유행 확률 낮게 봤지만…
백신 접종을 검토하던 자문위원회 내에선 돼지독감 유행 확률을 최대 20% 정도로 내다봤습니다. 훗날 사업 실패 뒤 조사를 해보니 당시 자문위에서 1918년과 같은 대재앙을 예측한 전문가는 한 명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왜 이런 결정을 내린 걸까요? 공중보건 당국의 애매모호한 태도가 문제를 키운 거로 보입니다. 구체적인 근거 없이 “100만명이 죽을 가능성이 있다” “유행은 제트기처럼 빠르게 퍼진다” “3개월 내 접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같은 발언들이 회의 석상에서 난무했다는 겁니다.
결국 “확률은 제로가 아니다”로 시작해 “있을 수 있다”로 발전, 최종 “있을 것이다”는 방향으로 보고서가 작성돼 대통령 책상에 올라갔습니다.
이런 보고서를 받아든 대통령 입장에선 “대참사가 예상되는 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한 정치적인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대통령 가족까지 동원해 접종 독려
어찌 된 영문이지 CDC는 예상했던 일이라고 밝힙니다. 접종과 무관하게 ‘우연히 동시에 발생한 사건(coincidental event)’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백신 부작용은 아니라는 겁니다.
당시 의학계도 대규모 백신 접종을 하다 보면 일부 고령층에서 증상이 발현되는 건 불가피하다고 봤습니다.
그러나 11월 12일 결정적인 역풍을 맞게 됩니다. 미네소타주에서 희소 질환인 길랑-바레 증후군(급성감염성다발신경염) 증세를 보인 사례가 나타난 겁니다.
이후 12월 중순까지 여러 주에서 50건 이상의 비슷한 사례가 동시다발적으로 보고되자 당국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원인 불명의 길랑-바레 증후군은 말초신경에 염증을 일으켜 사지와 얼굴, 호흡기관 등에 마비가 일어나는 무서운 질환입니다. 10만명당 1~2명꼴로 발현되는 드문 병이었습니다.
사후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백신 접종자들의 증상 발현율은 비 접종자보다 11배 높았습니다. 어느 정도 인과관계가 있다는 것이죠. 최종 보고된 피해자는 530여명입니다.
◇손해배상 책임 떠안은 美정부
그때까지 2개월 반 동안 미국에서 돼지독감 백신을 맞은 사람은 4000만명 이상, 역대 최대 규모였습니다.
이후 접종 사업은 재개되지 않았고, 이듬해인 77년 3월 공식 중단됩니다.
우려했던 대유행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당시 뉴욕타임즈는 “돼지독감의 불명예스러운 대실패”라고 정부 정책을 비꼬았습니다.
사회적인 후유증도 남았습니다. 백신 부작용을 이유로 4000여건의 손해배상 소송이 제기됐습니다. 피고는 미 정부였습니다.
그래서 백신 개발의 대가로 미 정부를 압박했습니다. 미 정부는 백신 접종 두 달 전, 손해배상 책임을 정부가 진다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코로나19가 44년 전의 돼지 인플루엔자 공포와 똑 같지는 않습니다. 이미 대유행이 현실화한 상황이기 때문이죠. 안전 기준도 당시와 비교하긴 어렵겠죠. 하지만 백신 개발에 각국이 국제 공조보다 선점 경쟁을 벌이는 상황에 우려를 거두긴 어렵습니다. 너무 서두르다 보면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상황이 더 어려워지면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해 비전문가인 정치인이 서둘러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때 과연 진짜 책임은 누구에게 돌아갈까요.
김상진 기자 kine3@joongang.co.kr
※ '알지RG'는 '알차고 지혜롭게 담아낸 진짜 국제뉴스(Real Global news)'라는 의미를 담은 중앙일보 국제외교안보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