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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RG]20세기초 한일 흔든 ‘감기마귀’ 그 공포가 마스크 유행 불렀다

중앙일보

입력 2020.02.11 05:00

※ '알지RG'는 '알차고 지혜롭게 담아낸 진짜 국제뉴스(Real Global news)'라는 의미를 담은 중앙일보 국제외교안보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1348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흑사병이 유행할 당시의 모습을 묘사한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삽화. [중앙포토]

1348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흑사병이 유행할 당시의 모습을 묘사한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삽화. [중앙포토]

새 부리를 닮은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검은 외투를 가운처럼 길게 늘어뜨린 기괴한 새인간. 17세기 이탈리아에서 흑사병(페스트)이 퍼진 마을을 돌던 속칭 ‘페스트 의사’(메디코 델라 페스테)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세계적인 전염병과 어떻게 싸웠나

그들은 염소가죽 띠로 허리를 조여맨 전신 가운으로 몸을 보호하고, 공기 정화 작용을 기대하며 긴 마스크 안에 향수를 뿌리거나 향신료를 넣었습니다.

원인 모를 질병 앞에서 한없이 나약하기만 한 인간 사회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죠. 대유행병에 악전고투하는 중국 우한의 의료진 역시 방호복과 마스크에 의존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좋은 향기로 나쁜 공기를 정화한다  

페스트 방호복에 대한 상세한 기술은 1619년 문헌에 처음 등장합니다. 페스트 의사는 차양이 넓고 높이가 낮은 모자를 썼습니다. 모자는 당시 공직자나 변호사, 의사 등 전문직들이 쓰는 일종의 신분증명 도구 중 하나였습니다. 각기 직업에 따라 다른 모양의 모자를 착용했기 때문이죠. 페스트 의사의 모자도 그런 필수 아이템 중 하나였던 것이죠. 또 나쁜 병의 기운이 머리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로도 쓰였습니다.

새의 부리를 모방한 안면 마스크는 페스트 의사의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긴 부리 안에 향수나 향신료를 넣어서 나쁜 공기를 몰아낸다는 의미로 고안됐죠. 일종의 방독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선구적인 페스트 의사로 평가받는 슈나벨 폰 롬을 묘사한 파울 푸르스트의 1965년 판화. [중앙포토]

선구적인 페스트 의사로 평가받는 슈나벨 폰 롬을 묘사한 파울 푸르스트의 1965년 판화. [중앙포토]

당시엔 전염병이 독성을 품은 나쁜 공기에 의해 전파된다고 봤습니다. 병사한 사체가 부패하면서 나오는 악취 역시 그런 나쁜 기운 때문이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매개체인 공기를 좋은 향기로 뒤덮는 것이 공기 정화라 철석같이 믿었던 겁니다.

지금의 방독면과 흡사한 면모도 있습니다. 눈 주위에 검은 원을 그려 넣었는데, 이는 마스크 위에 겹쳐 착용할 안경 자리입니다. 검은 롱코트 모양의 가운, 장갑과 부츠, 가죽띠 등은 페스트 의사의 피부가 감염자나 병원체와 접촉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했습니다. 나름 당시의 과학적인 근거에 기반한 최신 방호복이었던 셈이죠.

페스트 의사들은 흑사병이 퍼진 도시가 고용한 특별한 의사들이었습니다. 도시가 보수를 줬기 때문에 환자의 빈부를 따지지 않고 누구나 공평하게 치료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이들은 전문 의학 지식을 갖췄거나 경험이 풍부한 일류 의사들은 아니었습니다. 이름을 내놓고 장사하기엔 서툰 젊은 의사들이 많았습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선 의학 지식이 일천한 페스트 의사들이 꽤나 있어서 ‘실험주의자’라는 별칭도 가졌다고 합니다.

◇식민지 조선에도 불어 닥친 스페인독감  

1918년부터 2년에 걸쳐 약 5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독감은 이름과 달리 최초 발병지가 미국 시카고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였습니다. 유럽에 파병된 미군 장병들이 일종의 숙주가 됐던 것이죠. 전장에서 각국 군인들을 통해 널리 전파됐던 겁니다. 그걸 스페인 언론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스페인독감이란 명칭이 생겨났다고 하네요.

1918년 스페인독감 환자를 격리 수용한 미국 켄자스주의 임시병동 모습. 당시 스페인독감은 식민지 조선에서도 발생해 759만명이 감염되고 14만명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중앙포토]

1918년 스페인독감 환자를 격리 수용한 미국 켄자스주의 임시병동 모습. 당시 스페인독감은 식민지 조선에서도 발생해 759만명이 감염되고 14만명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중앙포토]

스페인독감은 아시아도 휩쓸었습니다. 식민지가 된 조선과 일본에도 비상이 걸렸죠.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1918년 통계연감에 따르면 759만의 조선 인구 중 38% 정도가 스페인독감에 감염돼 14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돌림감기’ ‘유행성 감기’ ‘독감’ 등의 용어가 당시 신문에선 혼재돼 사용됐습니다. 당시 신문은 런던, 뉴욕 등 전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스페인독감 소식도 비중 있게 다뤘습니다.

스페인독감 유행 당시 일본은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마스크를 애용하는 일본의 독특한 문화가 생겨난 것도 이때부터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TV아사히 등에 따르면 일본은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면서 공장용 마스크를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노동자들이 분진을 들이마시는 걸 막기 위해서였죠. 그러다가 스페인독감이 크게 유행하자 일반에게도 보급됐습니다.

스페인독감이 유행하던 당시 일본 정부가 발행한 포스터. 감염이 확산되는 것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감기 마귀'로 묘사한 덩치 큰 검은 고양이 모양의 괴수가 등장한다. [사진 일본 내각성 위생국]

스페인독감이 유행하던 당시 일본 정부가 발행한 포스터. 감염이 확산되는 것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감기 마귀'로 묘사한 덩치 큰 검은 고양이 모양의 괴수가 등장한다. [사진 일본 내각성 위생국]

당시 일본 정부가 배포한 포스터에는 검은 마스크를 쓴 신사와 부인이 등장합니다. “두려워하라! 유행성 감기 세균!”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마스크를 쓰지 말라!”라는 문구와 함께 말입니다. 경각심을 일으키기 위해 덩치가 큰 검은 고양이 모양의 괴수가 사람에게 입김을 불어넣는 모습을 묘사한 포스터도 있습니다. 이 괴수에겐 ‘감기 마귀’란 명칭을 붙여놨습니다.

검은 마스크의 뒷면에는 실처럼 얇은 금속 물질이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 금속이 일종의 필터 역할을 하면서 오염된 공기를 깨끗하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어찌 보면 흑사병 시대의 마스크 역할과 같습니다. 마스크 가격은 30전, 현재 가치로 따지면 3000엔(약 3만 2000원)에 해당하는 고가 제품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마스크는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고 합니다. 신종 코로나 사태로 동이 난 마스크 대란을 연상시킬 정도로 말입니다. 38만 명에 이르는 일본의 사망자 수는 그 이유를 대변합니다. 당시엔 항생제가 턱없이 부족해 마스크 등을 활용한 예방 이외엔 뾰족한 대책이 없었습니다.

◇ 슈퍼전파자 ‘장티푸스 메리’

이번 신종 코로나 사태는 18년 전 전세계를 긴장시켰던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와 곧잘 비교되곤 합니다. 사스는 홍콩을 중심으로 2002년 11월부터 약 9개월에 걸쳐 29개 국가와 지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전세계 8000여명이 감염됐고, 그중 약 800명이 숨졌습니다.

그런데 이번 신종 코로나는 사스보다 치사율은 낮지만 확산 속도는 훨씬 빠릅니다. 중국 우한에서 첫 발병이 보고된 지 1달 새 4만명 넘는 사람이 확진 판결을 받았고, 사망자도 900명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신종 코로나 국가별 확진·사망자 수,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신종 코로나 국가별 확진·사망자 수,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이를 놓고 여러 해석이 나오는데, 일각에선 해외 여행객의 증가를 그 배경으로 꼽습니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사스가 유행하던 2003년 전세계 해외여행객 수는 7억명 수준이었는데, 2018년에는 14억명을 돌파했습니다. 그중 중국의 해외여행객이 1억4300만명으로 압도적인 1위입니다.

감염학에서 가장 경계하는 건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전파하는가 입니다. 이른바 ‘슈퍼전파자’의 존재 여부입니다. 국내에서도 2015년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때 슈퍼전파자로 곤욕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역사에 남은 유명한 슈퍼전파자도 있습니다. ‘장티푸스 메리’로 불렸던 미국인 여성 메리 맬런입니다. 그는 1900년대 초 미국 뉴욕에서 유행한 장티푸스의 슈퍼전파자였습니다. 1900년부터 7년에 걸쳐 혼자서 51명을 감염시켰고, 그중 3명이 숨졌습니다. 이렇게 피해가 확산된 것은 메리의 직업이 요리사였던 데다가, 무증상 보균자였기 때문입니다.

1909년 뉴욕아메리칸 신문에 실린 일명 '장티푸스 메리' 메리 맬런을 다룬 기사와 삽화. 그는 죄인으로 다뤄졌다. [중앙포토]

1909년 뉴욕아메리칸 신문에 실린 일명 '장티푸스 메리' 메리 맬런을 다룬 기사와 삽화. 그는 죄인으로 다뤄졌다. [중앙포토]

결국 미국 보건당국은 역학조사로 추적한 끝에 메리를 발견했고, 그를 강제 격리시켰습니다. 메리는 30년 간의 격리 생활을 계속하다가 슬픈 생을 마감했습니다.

국제학술지에 게재된 사스 연구 논문에는 최대 329명까지 감염시킨 슈퍼전파자 사례가 나옵니다. 홍콩의 한 아파트에서 나타났는데, 하수 시설이 노후화 돼 벌어진 참극이었습니다. 사스 때는 확진자 중 70% 이상이 슈퍼전파자로부터 감염됐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다행인 건 이번 신종 코로나의 경우 아직까지 이렇다 할 슈퍼전파자가 없다는 점입니다. 진원지인 중국이 진정 국면에 접어들면 전세계 상황도 급속히 호전될 것이란 희망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김상진 기자 kine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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