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하 사진평론가는 이 사진을 가리켜 "궁핍한 시대가 탄생시킨 명작"이라고 했다. "군더더기 없는 구도와 인물의 자연스러운 포즈"로 전후 실업자가 넘쳐나던 현실을 생생하게, 또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얘기다. 임응식이 1957년 서울 청계천에서 찍은 '청계천 사람들' 역시 빈곤했던 1950년대 풍경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개천을 끼고 빼곡히 들어선 판잣집들이 보이고, 개천 한가운데 엉성하게 만들어놓은 메뉴판이 눈에 띈다. 설농탕 100환, 백반 150환, 불고기백반 300환···. 오래전 눈 밝은 사진가가 발로 뛰어다니며 렌즈로 낚아챈 이 순간들이 지난 50여년간 한국 사회가 겪은 변화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한국 사진의 선구자' 임응식
'부산에서 서울로' 52점 소개
1946~60년 서울, 부산 풍경
'한국 사진계의 태두' 임응식
1912년 부산에서 태어난 임응식은 일본 와세다 중학교 입학 선물로 카메라를 받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1933년 일본인 중심으로 결성된 부산여광사진구락부에 가입하고 1934년 일본 사진잡지인 ‘사진살롱’에 출품한 작품이 입선되면서 등단했다. 이후 그는 일본 도시마체신학교를 졸업한 뒤 강릉·부산 체신국에서 근무하며 사진 작업을 이어갔다. 1944~46년 일본물리탐광주식회사에서 과학사진을 찍었고, 1946년부터 부산에서 사진현상소 ‘아르스(ARS)’를 운영했다.
사진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그는 사진에 관한 한 '최초' 타이틀을 줄줄이 보유하고 있다. 1952년 12월 한국사진작가협회를 창립했고, 1953년 국내 사진가로는 처음으로 서울대 미대에서 사진강좌를 맡았다. 이후 그는 1974~78년 중앙대 사진과 교수를 역임했다. 그는 사진작가로는 처음으로 198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연 작가이기도 하다. 이어 2011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도 탄생 100년을 기념하는 전시가 열린 바 있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렇다고 임응식이 주목하고 포착한 1950년대 전후 사회가 '구직' 사진처럼 빈궁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시선은 당시 사회에 감돌던 역동적인 공기를 그냥 놓치지 않았다. 1946년 부산 서면에서 찍은 '아침'이란 사진도 그중 한 예다. 댕기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소녀 셋이 머리에서 꽃을 가득 채운 양은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걸어가고 있다. 아침 햇살을 흠뻑 받으며 걸어가는 그녀들의 모습에 눈부신 활기가 감돈다.
최연하 평론가는 "이번 전시는 특히 전쟁 중이거나 폐허에서 복구 중인 부산과 서울의 시대상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면서 "거칠고, 소란스럽고, 위태롭고, 어지러운 당시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전했다.
이것이 명동이다
"나의 생활 속에서 명동을 떼어놓을 수 없다. 찍고, 찍고 또 찍어도 한없이 찍고 싶다. 명동의 망령이라도 붙어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다"고 쓴 임응식은 1950년대부터 2001년 세상을 떠날 때 가지 틈만 나면 카메라를 들고 명동 거리를 누볐다고 한다.
"임응식 업적 더 연구·조명돼야"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