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FOA는 우리 몸에 축적돼 중증 질병과 암을 유발한다는 게 과학적으로 증명됐어요. 지구상 99% 생물의 몸 안에 있고 우리도 감염됐어요. 기업은 최소 40년 동안 이 약품을 유출해왔고 이를 숨겨왔습니다.”
마블 히어로 ‘헐크’의 배우 마크 러팔로(53)의 경고다. SF 속 외계물질 얘기가 아니다. PFOA, 풀어서 과불화옥탄산(perfluoro octanoic acid). ‘C8’로도 알려진 이 100% 인공 화합물은 주방에 하나쯤 있는 들러붙지 않는 프라이팬의 코팅제 ‘테프론’ 속 화학물질이다. 테프론 프라이팬을 ‘지나치게 고온 가열하면’ 유독물질이 나온다는 얘긴 들어본 적 있을 터다.
들러붙지 않는 프라이팬의 배신
'다크 워터스' 제작ㆍ주연 마크 러팔로
美기업 듀폰 8000억 소송 다뤄
20년간 듀폰 파헤친 미국 변호사
"이미 전지구 인류 혈관 오염됐다"
배우이자 환경운동가 마크 러팔로가 제작‧주연해 11일 개봉하는 영화 ‘다크 워터스’는 바로 이 거대 기업을 상대로 20여년간 홀로 싸운 실존 변호사 롭 빌럿(55)의 이야기를 좇는다. 2016년 뉴욕타임스 매거진의 탐사보도를 보고 충격받은 러팔로는 ‘캐롤’ ‘벨벳 골드마인’의 토드 헤인즈 감독에게 시나리오를 보내 직접 섭외하기도 했다.
대기업 듀폰의 8000억 배상사건
어릴 적 추억이 서린 할머니댁 이웃이었기에 현장을 검토하러 나갔지만, 빌럿은 기업가들을 신뢰했고 문제가 있더라도 작은 실수일 거라 믿었다. 그러나 결과는 상상 밖이었다. “절대 버려져선 안 되는, 규제조차 안 된 물질이 검출됐죠.” 실제 롭 빌럿이 영화사에 전한 얘기다.
유독성? 사람이 타이어 마시는 것 같아
“만약 이걸 마신다면요?”(빌럿)
“마치 타이어를 삼키면 어떠냐고 묻는 셈인데, 그러고 싶어요?”(화학전문가)
테넌트의 젖소들은 골짜기 물을 마시고 피부가 부풀고 눈이 멀고 미치고 암이 생기고 장기가 비대해진 채 죽었다. 자그마치 190마리였다. 다음 비극은 사람들에게 닥쳤다.
차라리 이 땅을 떠나라는 빌럿의 조언에 테넌트는 말한다. “이미 늦었어 산드라(아내)와 나도 이미 암이거든.”
한때 가족의 소중한 보금자리였던 테넌트의 농가에서 오가는 이 대화는 드넓은 대륙을 계속해서 개척해나가면 된다는 식으로 이어져 온 미국식 개발사를 꼬집는 듯하다. 테넌트는 2009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세계적 규모 환경오염 미국서 시작된 이유
그에 따르면 “이 100% 인공화합물은 2차 세계대전 직후 만들어졌고, 안타깝게도 미국 정부의 원칙과 법령은 환경보호국 설립 이전에 존재해온 것들에 대한 검토가 미진”했다. 그 결과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오염과 그것에 대한 은폐”(마크 러팔로)였다.
이후 듀폰의 화학물질 무단 유출 폭로 및 집단 소송 제기, 피해 사실 조사 등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보도됐다. 영화엔 MBC 뉴스데스크 엄기영 앵커의 방송화면도 잠깐 나온다. 2017년엔 화학물질 노출 피해자 3535건에 대해 듀폰사와 8000억원 규모 보상금 합의에 이르렀다.
기업 보상까지 고통의 20년
가습기 살균제, 전북 익산 장점마을의 비료공장으로 인한 암 집단 발병 사태 등 국내 사건이 떠오르는 대목이 한둘이 아니다.
곱씹게 되는 건 또 있다. 바로 롭 빌럿이란 변호사의 존재다. 이번 영화를 위해 빌럿 가족과 긴밀히 교류한 마크 러팔로는 “롭은 피고측(화학기업) 변호사 시절의 감각과 훈련을 모두 활용해서 원고측(화학물질 피해자) 변호를 맡고 있다”면서 “혁명적인 일이다. 이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을 상대로 싸워 이기고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보건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화학기업 폭로, 이제 시작이다
그간 뒤집힌 듀폰의 주장만 봐도 밝혀질 사실이 많아 보인다. 2003년 듀폰은 테프론 프라이팬에 대해 “260도 이상 가열하면 테프론에서 해로운 물질이 나올 수 있으나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260도 이상 가열하지 않는다”고 해명했지만, 지금은 이런 불소수지 코팅 냄비·프라이팬은 빈 상태로 2분만 가열해도 380~390도의 고온에 이르고 유해한 가스·입자를 배출한다는 게 알려졌다.
빌럿은 이미 이 물질이 여러 대기업과 제품을 통해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오염시켰다고 경고한다. 그는 “지구상 모든 이들의 혈관은 이 물질에 오염됐다. 국가적이고 전지구적인 오염이었음에도 자신이 이 물질에 노출됐고 오염된 물을 마셨고 혈관에 흐른다는 사실을 모른다”면서 이번 영화도 “대중에게 알릴 기회였다. 공공건강에 얼마나 치명적인지 보여주면 뭔가 일어나리라 믿었다”고 했다. 그는 여전히 듀폰 외에도 이런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3M·케무어스에 소송을 제기해 싸우고 있다.
기형장애 피해자 "듀폰에 거짓말쟁이 몰려"
“그 긴 세월 억울함을 호소하고 기억을 되짚으며 듀폰과 싸웠는데 무시당했고 거절당했고 거짓말쟁이라는 소리까지 들었어요. 하지만 모두 진실입니다. 그 긴 싸움을 치러내신 어머니가 제 영웅입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