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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하늘로 가요” 한국 토크쇼 개척자 떠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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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1990년대 ‘자니윤 쇼’를 진행하며 국내 토크쇼 문화를 개척한 자니윤. [유튜브 캡처]

1990년대 ‘자니윤 쇼’를 진행하며 국내 토크쇼 문화를 개척한 자니윤. [유튜브 캡처]

한국인 코미디언으로서 미국인을 처음 웃긴, ‘원조 한류 스타’ 자니윤(한국명 윤종승)이 8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별세했다. 84세.

국내 첫 성인 토크쇼 자니윤 별세 #야한 농담, 느끼한 발음으로 인기 #미국선 인종차별 풍자한 코미디 #1973년 뉴욕 최고연예인상 받아 #유지 따라 시신은 미 병원에 기증

1936년 충북 음성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울 성동고 졸업 뒤 유학길에 올라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 성악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뒤 미국에서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활동하며 다재다능한 끼를 발휘한 그는 자극적인 욕설 등을 쓰지 않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성적 풍자, 정치 풍자 등을 간결하게 툭툭 던지고 넘어가는 식으로 미국인들을 웃겼다. 인종차별 등의 예민한 문제도 자신이 동양계 이민자여서 잘 모르는 것처럼 시치미 뚝 떼고 건드렸다 얼른 빠지는 방식으로 코미디에 활용했다. 이름 ‘자니’는 한국 이름 ‘종승’을 미국인들이 발음하기 어려워해 비슷한 이름 ‘존(John)’을 사용하다 애칭 ‘자니’로 발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인생에 전기가 된 것은 1977년 당시 최고의 코미디쇼인 NBC TV ‘조니 카슨의 더 투나잇 쇼’에 게스트로 출연한 것이다. 처음에는 비중이 크지 않았으나, 영화배우 찰턴 헤스턴이 지각하는 바람에 20분간 시간을 끌면서 인상 깊은 코미디를 선보였다. 1980년까지 이 프로그램에 총 34회에 출연했고, 이후 NBC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자니 윤 스페셜쇼’ 등을 진행하며 인기를 누렸다. 1973년엔 뉴욕 최고연예인상을 받았다. 1980년대에는 직접 주연을 맡아 영화 ‘내 이름은 브루스’ 1·2편을 제작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1989∼1990년 KBS2 ‘자니윤 쇼’를 진행하며 국내 토크쇼 문화를 개척했다. 한국어와 영어가 섞인 특유의 ‘느끼한’ 발음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밤 11시에 편성된  ‘자니윤 쇼’는 당시 한국 방송에서 보기 힘들었던 수위 높은 야한 농담으로 미국식 성인 코미디를 선보여 인기를 끌었다. 이후 SBS가 TV 방송을 개국한 뒤 ‘자니윤 이야기쇼’(1991∼92)로 무대를 옮겼고, ‘주병진 쇼’, ‘서세원 쇼’, ‘이홍렬 쇼’처럼 코미디언 개인의 이름을 내건 토크쇼들이 잇따라 나오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고인은 2011년 KBS 2TV ‘승승장구’에 출연해 “당시에는 언론의 자유가 없었고 방송에서도 제한된 것이 많았다. 열심히 방송해도 편집 당하기 일쑤였다. 나는 정치·섹시 코미디를 즐겼는데 제재를 많이 받았다”며 1990년대 초반 한국 방송의 현실을 꼬집기도 했다. ‘자니윤 쇼’ 당시 보조 MC로 함께 진행했던 가수 조영남은 10일 고인의 별세 소식을 듣고 “일상에서도 유머가 넘치는 분이셨다”며 “토크쇼 보조를 하면서 ‘유머 속에 사회 이슈를 저렇게 구사할 수 있구나’ 감탄하며 배웠다”고 돌아봤다.

정치와의 인연도 있다. ‘자니윤 이야기쇼’ 이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2007년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LA를 방문했을 때 만나 ‘박근혜 후원회 모임’ 회장을 맡게 된다. 2012년 대선 당시엔 박근혜 후보 재외국민본부장을 맡아 선거운동을 했고, 2014년 한국관광공사 상임감사로 임명돼 낙하산 인사 논란이 일기도 했다. 2016년 임기 종료를 앞두고 뇌출혈로 입원했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요양 생활을 했다. LA의 헌팅턴 양로센터에서 지냈는데, 말년에는 치매까지 앓았다고 한다. 지난 4일 혈압 저하 등으로 LA의 알함브라 메디컬센터에 입원했으나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시신은 평소 고인의 뜻에 따라 캘리포니아대학 어바인 메디컬센터에 기증하기로 했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치러질 예정이다.

이지영·강혜란 기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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