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알겠지, 그 '하얀 옷 입은 언니'가 엄마라는 걸

중앙일보

입력 2020.01.06 15:00

수정 2020.01.07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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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배은희의 색다른 동거(15)

 
“이거 하얀 옷 입은 언니가 사 준 거야!”
은지는 보는 사람마다 스티커 책을 자랑했다. 색을 칠하고, 가위로 오리고, 스티커를 붙이면서 수시로 가지고 놀았다. 잠잘 때도 스티커 책을 옆에 끼고 잤다. ‘하얀 옷 입은 언니’는 스티커 책도 사 주고, 그림책도 읽어 주고, 다음에 또 만나자고 약속 했다.
 

친엄마에게 받은 스티커 책을 애지중지 가지고 노는 은지. 잘 때도 옆에 끼고 잘 정도로 아꼈다. [사진 배은희]

 
“그래, 친엄마가 너무 젊지.” 은지 친엄마는 우리 큰애 보다 한 살 위다. 미혼모 시설에서 처음 만났을 때 정말 애기 엄마가 맞나 싶을 만큼 여리고, 앳된 소녀였다. 은지를 품에 안고 혹시나 내가 데려 갈까봐 불안해하며 경계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인생이 참,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은지 친엄마도 아이랑 이렇게 헤어져 살 것이라곤 짐작도 못 했을 거다. 은지를 위탁 가정에 보내놓고, 아무리 아르바이트를 해도 돈은 모아지지 않고, 은지는 하루가 다르게 크고 있으니….
나도 그렇다. 두 아이를 다 키워놓고 여유를 부릴 즈음 위탁엄마가 됐다. 그 선택으로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다. 마치 서로 다른 나무가 접붙여지 듯 깎이고, 참아내는 시간을 보냈다.
 
내 시간이 깎이고, 공간이 묶이면서 보이지 않는 진액이 나왔을까? 이젠 한그루의 나무처럼 은지와 같이 호흡하며 살고 있다. 신기하다, 이렇게도 살 수 있다는 게. 감사하다, 이렇게 인생을 배워갈 수 있다는 게….


[사진 중앙가정위탁지원센터]

 
2018년 가정위탁보호 현황보고서에 따르면 가정위탁보호 사유로 이혼이 30.6%로 1위다. 그 다음으로 별거·가출(25.6%), 부모 중 한쪽의 사망(24.3%), 부모 모두 사망(5.4%) 순이다. 어쩌면 그래프 밖에서 방황하는 인생이 더 있을지 모른다. 그건 또 다른 인생에게 영향을 주게 될 테고, 사회문제로까지 번지게 될 텐데, 걱정이다. 우리는 사회라는 대지에 같이 살고 있지 않은가.
 
위탁엄마가 되고, 귀가 따갑게 들었던 말이 ‘남의 자식 어떻게 키우냐’는 거였다. 처음엔 얼굴이 화끈거리고 화도 났지만 이젠 이해가 된다. 아직 우리 사회는 위탁가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해 줄만큼 자라지 못한 것이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
 
오늘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날이다. 시간은 가는데 원고는 안 써지고, 컴퓨터는 자꾸 꺼지고…. 지도교수님이 보내 준 논문은 영어 원서다. 한숨을 푹 쉬고, 밥이나 먹고 다시 집중해보자 하는데 밥솥을 열었더니 밥이 하나도 없다.
 

주말엔 제주도 이곳 저곳을 놀러 다닌다. 지난 9월, 신촌리에서.

 
소소한 일상도 그렇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어쩌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생이기 때문에 더 소중한 게 아닐까? 절망적일 때도, 바닥을 칠 때도, 그게 끝은 아니니까.
 
은지엄마로 살면서 깎이고, 참아낸 시간은 결국 나의 생장점이 됐다. 낯선 인생을 선택한 위로의 선물처럼 ‘위탁엄마’는 성장의 출발점이 됐다. 감사하다. 아픈 만큼 성숙할 수 있어서.
 
은지도 머지않아 알겠지. ‘하얀 옷 입은 언니’가 친엄마라는 걸. 그날이 조금 두렵지만 그것도 인생의 한 부분이니 어쩌겠는가. 또 흘러가겠지. 그러면서 은지도 생장점 하나를 가지게 되겠지. “은지야, 우리 잘 버텨보자!”
 
위탁부모·시인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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