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우주' 韓 최초 132억…10분간 33회 치열한 입찰싸움

중앙일보

입력 2019.11.24 07:30

수정 2019.11.24 07:37

SNS로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23일 홍콩 경매에 앞서 지난 11월 2~11일 뉴욕 록펠러센터 전시장에서 선보인 '우주'.[사진 크리스티]

33회 치열한 입찰 경합

23일 오후 6시 8분. 크리스티 홍콩 가을 경매 이브닝 세일 ‘20세기 & 동시대 미술’이 열린 홍콩컨벤션전시센터(HKCEC) 그랜드 홀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김환기의 대형 푸른 점화 ‘우주’(Universe 5-IV-71 #200)가 이날 17번째 경매 미술품으로 등장한 순간이었다.  
 
과연 지난해 세운 한국 미술품 최고가 기록을 세울 수 있을까? 한국에서 이 경매 현장을 지켜보기 위해 찾아온 이들이 모두 숨죽이고 경매사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23일 오후 홍콩 크리스티 경매 현장
10분만에 최고가 기록 세우고 종료
"구매한 사람은 한국인 아냐"

크리스티의 추정가는 4800만 홍콩달러, 한화 약 71억원. 하지만 이날 경매는 4000만 홍콩달러 한화 약 59억원으로 시작했다. 경매가 시작되자마자 전화 입찰자들의 호가로 천만 홍콩달러씩 껑충껑충 뛰었다. 가격은 불과 몇 분 만에 6200만 홍콩달러(약 91억원)를 넘으며 이미 김환기 작품의 최고가 기록(85억원)을 훌쩍 넘어섰다.   
 
입찰자가 없거나 경합이 없을 경우 경매는 빠르면 1분 내지는 30초 안에 끝난다. 하지만 김환기의 ‘우주’는 10분 동안이나 경합이 이어졌다. 응찰가가 8000만 홍콩달러를 넘겼을 때부터 이학준 크리스티 코리아 대표와 프란시스 벨린(Francis Belin) 크리스티 아시아 총괄 사장에게 대리 응찰을 부탁한 전화 응찰자들의 본격적인 눈치 싸움이 시작됐다.   

23일 홍콩 경매에서 김환기 작품 '우주'가 132억원에 낙찰되는 순간. [사진 크리스티]

수수료까지 더하면 153억원

8000만 홍콩달러를 넘긴 시점에서 이미 ‘우주’는 한국 미술 작품상 최초로 100억을 넘었지만 입찰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갈수록 경합자들의 열기가 더해졌다. 결국 33회의 응찰 끝에 벨린 총괄 사장이 대리한 전화 입찰자에게 132억에 낙찰됐다.  
 
이번에 132억원에 김환기의 작품을 낙찰받은 사람의 국적은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한국인은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낙찰가는 수수료까지 포함하면 1억 195만5000 홍콩달러로, 총 153억이 넘을 전망이다.  


이학준 크리스티 코리아 대표는 “100억대 이상에 거래가 된다고 하면 본격적으로 김환기의 작품이 세계 주류 미술시장에 진입이 된다는 의미가 있다”며 “차세대 작가들이 본격적으로 국제 미술 시장에 진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고 내다봤다.  
 
같은 날 서울옥션의 홍콩 세일을 위해 컨벤션센터에 있던 이옥경 서울옥션 부회장 역시 “한국 미술의 역사적 사건”이라며 “이번 100억 경신을 계기로 훨씬 더 많은 작가가 세계 미술 시장에 데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우주', 김환기 작품 중 유일한 두폭화

‘우주’는 김환기 작품 중 유일한 두폭화(diptych)이다. 이는 뉴욕 시절 김환기의 추상예술의 정수이며, 그의 작품 중 가장 큰 작품이기도 하다. 세로 254cm, 가로 254cm의 화폭을 푸른 점들이 가득 메우며 두 원의 형상을 이루고 있다. 이는 김환기 작고 3년 전에 완성한 것으로 그의 그림 중 가장 대표적으로 손꼽히지만, 경매 시장에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우주’를 소장해온 이들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김마태(한국명 김정준)·전재금씨 부부. 1951년 부산 피난시절 김환기를 만난 부부는 그에게서 작품을 직접 사들여 50년 가까이 보관해왔다. 첫 만남부터 김 화백이 타계한 1974년까지 김마태씨는 단순한 후원가를 넘어 친구로서 김환기의 작품 활동을 지원해왔고, 그에게 있어서 ‘우주’는 "미술 작품 이상이었다"고 한다.  
 

1972년 김마태 박사의 거실서 자신의 작품 '우주' 앞에 앉아 있는 김환기. [사진 환기재단·환기미술관]

‘우주’는 그동안 환기미술관에서만 전시됐다. 이후 크리스티를 비롯한 여러 경매사나 바이어들이 재단 측으로 숱한 러브콜을 보냈으나 소장자인 김마태씨가 답한 적은 없었다. 그런 소장자가 ‘우주’를 경매에 내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에블린 린 (Evelyn Lin) 크리스티 홍콩 아시아 20세기 & 동시대 미술 부문 부회장은 "그가 작품을 시장에 내놓은 것은 단순히 판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술 시장 내에서 김환기에게 걸맞은 자리를 찾아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전했다.   
 
“(김마태·전재금씨 부부가) 크리스티 뉴욕에 연락해 왔을 때, 저는 운명을 느꼈어요. 김환기의 작품을 미술 시장에서 올바르게 자리매김(포지셔닝)하는 것이 김마태씨의 꿈이었기에 크리스티 뉴욕에 먼저 연락해온 것입니다.”
 
린 부회장은 김환기의 ‘우주’가 한국 추상미술의 정수뿐만 아니라 “아시아 문화 자체를 대변”한다고 말했다. 두 개의 원은 음과 양의 조화, 해와 달, 빛과 그림자, 삶과 죽음, 남성과 여성 등과 같은 우주의 모든 기운을 상징한다는 점에서다. 제목이 ‘우주’인 것도 그런 이유다. 
 

김환기 기록, 여기서 끝날까?

이미 한국 미술 시장에서는 김환기의 경쟁상대는 김환기뿐이었다.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 톱5가 전부 김환기 작품이다. 앞서 지난해 5월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붉은색 점화 ‘3-II-72 #220’이 85억에 낙찰되면서 김환기의 최고가 기록과 한국 미술품 경매 기록이 경신된 바 있다. 올해 4월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는 분홍색 점화 ‘무제’가 71억원에 낙찰됐다.  
 
작품가격 사이트 K-Artprice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19년 상반기까지 지난 5년간 김환기의 작품은 총 1413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김환기 작품은 나오기만 하면 최고가”라는 것이 이학준 크리스티 코리아 대표의 설명이다. 린 부회장은 전날 경매에 앞서 “김환기의 신기록은 ‘우주’만이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한국미술 성장에 직결될까?

하지만 린 부회장은 “(김환기 작품의 최고가 기록이)바로 한국 미술 시장의 성장과 직결되지는 않을 것”이라 덧붙였다. 김환기의 작품이 재평가되는 것은 그 자체로 유의미하지만, 한국 미술의 걸작(마스터피스)은 경매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번 신기록은 “김환기 미술 시장만 바꿀 것”이라 말했다. “한국에는 좋은 작품들이 많지만 대부분이 미술관 소장이라 시장에는 좋은 작품이 많이 없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한국을 처음 방문한 후 정상화 화백의 그림을 보고 반했지만, 작품 가격이 터무니없이 낮았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 미술 시장을 부흥시키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게 됐다”고 전했다. 현재 한국 미술 시장은 연간 4000억원 규모로, 28조원 정도의 미국이나 여타 선진국과는 비교하기 어렵다.  
 

"한국 미술 저평가돼 있다"

린 부회장은 “이번 경매에 나온 김환기, 박서보 등 많은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인정받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한국 미술 자체가 저평가되어 있다”면서 “미술은 어떤 아이디어를 어떤 방식으로 소개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변한다”며 “한국 미술에는 충분한 잠재력이 있다”고 밝혔다.
 

관련기사

홍콩=윤소연 코리아중앙데일리 기자 yoon.soye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