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충기의 삽질일기
1950년대까지 바나나는 그로 미셸 품종이 대세였다. 맛과 향이 뛰어나고 껍질이 두꺼워 장거리 운송이 가능해 상품가치가 높았다. 그런데 전염병인 파나마병이 돌아 전멸했다. 캐번디시 품종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지금 시장에서 파는 바나나는 모두 캐번디시다. 이번에는 이 품종이 변종 파나마병에 급속도로 무너지고 있다. 바나나멸종설마저 나돈다. 연구자들이 대체품종을 개발하겠지만 종이 다양하다면 멸종 우려는 줄어들 테다.
현리에 얽힌 얘기 한 도막. 내 친구 A가 군대 간 친구 면회하러 현리를 찾아갔다. 아침 일찍 떠나 종일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며 갔는데 친구를 만날 수 없었다. 알고 보니 친구 부대는 가평군 현리가 아니라 인제군 현리였다. 인제 현리도 군부대가 많은 동네다. 엉뚱한 산골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와야 했으니 거참.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이야기다.
선비잡이콩은 두 뺨에 커다란 점이 있다. 맛이 기가 막혀 선비가 먹물 묻은 손가락으로 집어 먹다가 검은 물이 들었단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송편에 넣어 먹는 콩이다. 1줄을 심었는데 겨우 2포기만 싹이 텄다. 내년에 심으려 모두 종자용으로 남겨 놨다. 홀아비밤콩은 3줄을 심었다. 자랄 때 순을 집어주면 가지가 많이 벌어진다. 콩탕과 콩국 맛이 일품이다. 물에 불리면 손톱보다 커진단다. 껍질이 잿빛인 재팥은 밥에 넣어도 쌀이 물들지 않는다. 1말에 13만원 한다.
오이가 늙으면 당연히 노각이 되는 줄 알았는데 종자가 따로 있다. 노각오이는 열매가 크고 무거워 호박처럼 덩굴이 땅을 기도록 놔둔다. 조선오이는 서양오이보다 작고 동그랗다. 동네 할아버지 한 분이 왜오이 모종을 사다 심었는데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거의 다 죽었다. 남은 덩굴마저 노균병이 걸려 말라죽었다. 조선오이는 멀쩡했다. 게다가 서리 내릴 때까지 따먹을 수 있다.
운이 좋았다. 옆집 팔순 넘은 송연석 할머니는 토종 씨앗 부자다. 젊어서부터 씨앗을 받고 심어왔다. 부부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봐 온 할머니가 조금씩 씨앗을 나누어주었다. 자신이 지켜온 씨앗을 내리 물림 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할머니는 올해 다리를 다쳐 심어놓은 작물도 제대로 거두지 못했다. 부부는 이렇게 이웃들에게 하나하나 얻은 씨앗들을 심는다. 먹을 만큼만 심고 심을 만큼만 씨를 받는데 매년 종류가 늘어난다.
애호박 모종을 사다 심어봤다. 흠결 없이 예쁘장한 열매가 줄줄이 달렸다. 씨를 받아 다음 해에 심었다. 기대를 저버리고 긴 놈, 조롱박처럼 생긴 놈, 휜 놈, 동그란 놈, 울퉁불퉁한 놈… 하나같이 이상한 놈들만 달렸다. 돈벌이가 목적인 종자회사에서 뭔지 모를 처리를 했기 때문이다.
외환위기를 겪으며 국내 종자회사들이 무너졌다. 흥농종묘와 중앙종묘는 멕시코의 세미니스를 거쳐 미국 몬샌토에 넘어갔다. 이 몬샌토가 지난해 독일 바이엘에 넘어갔다. 서울종묘는 스위스 노바티스 신젠타를 거쳐 중국 화공그룹이 인수했다. 청원종묘는 일본 사카타 소유다. 2000여 개의 국산 종자 소유권도 함께 넘어갔다. 청양고추는 중앙종묘가 육종했으니 이제 그 씨앗을 사면 바이엘이 로열티를 챙긴다. 제주 감귤의 90% 이상은 일본 품종이다.
토종이 최고는 아니다. 많고 많은 종자 중의 일부일 뿐이다. 꽃대가 빨리 올라오는 토종상추는 오래 따먹을 수 있는 외래 종자에 밀린다. 다른 경우도 있다. 같은 아욱 씨앗으로 50년 넘게 농사를 짓는 할머니가 있다. 외래종보다 잎이 풍성해 이웃들이 감탄한다. 할머니는 잎이 특히 크게 자라는 줄기에서 종자를 받는다. 그러니 근친상간이 열성을 만든다며 종자를 주기적으로 바꿔줘야 한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닌 셈이다. 쥐눈이콩을 심어 드시는 할머니는 검은 머리털이 다시 자라고 있단다.
부부는 산짐승들이 더 걱정이다. 지난여름 옥수수를 처음 따서 쪄먹고 다음 날 아침에 경악했다. 아침에 나가보니 멧돼지가 줄기를 몽땅 쓰러트려 탈탈 털어먹고 튀었다. 보은에서 가져온 토종찰옥수수였다. 옆집에 나눠준 종자가 살아남아 겨우 한 통을 얻어놓았다. 놈들의 난동에 산에 있는 밤과 도토리도 씨가 마를 지경이라는데, 얘들을 어쩌나.
서리 내리고 높은 산에는 눈도 내렸다. 내 밭도 무와 배추를 거두었다. <끝>
그림·사진·글=안충기 아트전문기자 newnew9@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