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때면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가 떠오릅니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로 시작하는 ‘가을날’ 말입니다.
editor’s letter
다시 ‘가을날’을 찾아 읽다가 학창시절 궁금했던 구절이 눈에 띄었습니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라는 대목입니다. 당시엔 ‘집이 없다면 당장에라도 어떻게 해서라도 지어야 하지 않겠는가. 추운 겨울이 곧 닥쳐올 텐데’라는 생각이었죠. 하지만 이젠 릴케의 생각이 어렴풋이 짐작됩니다. 인간의 게으름과 나태에 대한 통렬한 비판입니다. 가을이 될 때까지 좋은 세월 동안 도대체 뭘 했느냐는 힐난이랄까. 하여 지금까지 집이 없는 사람은 “불안스레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수 밖에 없는 것이라는. 가을에 씨를 뿌리는 사람은 농부가 아니겠지요.
정형모 문화에디터 hyu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