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듣는 질문이다. 원하는 답은 아니겠지만, 만병통치약 같은 전방위적 절대 폰트가 있지는 않다. 특정한 상황에서 잘 기능하는 폰트가 다른 상황에서는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폰트 디자이너와 타이포그래퍼들은 복합적인 판단을 통해 보다 나은 해결책을 찾아 나가는 훈련을 한다. 각각의 디자인 문제마다 각각의 해결책이 있다.
유지원의 글자 풍경 :
길 산스 울트라 볼드 i (Gill Sans Ultra Bold i)
길 산스(Gill Sans)
길 산스는 에릭 길(Eric Gill)이 디자인한 산세리프 폰트다. 산세리프(sans serif)의 sans은 프랑스어로 without으로, 세리프가 없다는 뜻이다. 산스(sans)라고도 부른다. 한글로 치면 고딕체 계열에 속한다.
길 산스는 에릭 길의 스승인 에드워드 존스턴이 디자인한 존스턴체와 닮았다. 존스턴체는 런던 지하철에 적용돼 100년 넘도록 런던 시민들의 공공생활을 함께 해오고 있는 글자체다. 에릭 길은 존스턴체에서 영감을 얻어 꾸준히 수정해나간 길 산스체를 출시했다. 길 산스는 큰 성공을 거두면서 런던 거리의 포스터·시간표·대중 교통에 속속 등장했다. 어찌나 널리 퍼져 자주 보이던지 마치 영국의 국가 공용서체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그렇다고 길 산스가 꼭 영국에서만 보이는 건 아니다. 일본의 한 엘리베이터 안에서 버튼을 누르며 “길 산스네?”하던 기억이 난다. 올려다보니 미쓰비시의 상표가 보였다. 미쓰비시 엘리베이터는 버튼에 한해 길 산스체의 숫자 폰트를 쓴다. 일본만큼 자주 보이지는 않지만, 한국에서도 버튼을 누를 때 길 산스가 보이면 어김없이 미쓰비시 엘리베이터다.
울트라 볼드(Ultra Bold)
소프트웨어에서 볼드[B] 버튼을 누를 때, 그 폰트에 볼드체가 있으면 해당 볼드체를 불러오지만, 없으면 기계적인 방식으로 레귤러체를 두껍게 한 겹 입힌다. 이것을 ‘가짜 볼드체’라고 한다. 제대로 디자인된 진짜 볼드체는 둔중하게 겨울옷을 껴입은 모습이 아니라 글래머러스한 모습에 가깝다. 볼드체는 울트라 볼드(Ultra Bold)를 지나 파생 방식에 따라 각각 블랙(black), 팻(fat), 헤비(heavy) 등으로 나아간다.
소문자 i
길 산스 울트라 볼드 i
이런 파생 규칙들을 염두에 두고 다음 문제를 풀어보자. 더이상 간단하기도 어려울 듯 보이는 문제다. 길 산스 레귤러 i를 울트라 볼드로 파생하려면 어떤 모양이 적절할까?
타이포그래피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약 15분의 시간을 주고 이 문제를 풀게 하니 다양한 결과물이 나왔다. 분명 더 나은 해결책도 있고 설득력이 떨어지는 해결책도 있다.
결과물들을 벽에 붙여놓고 에릭 길이 길 산스 울트라 볼드 i를 해결한 모습을 보여주니, 학생들의 입에서 야트막한 웃음과 탄식이 흘러나왔다. 에릭 길은 앞서 예를 든 다른 산세리프체들처럼 체계적인 파생 규칙을 고안하기보다는, 각 웨이트의 성격에 맞게 직관적인 디자인을 했다. 그는 지성의 디자이너라기보다는 경험과 몸의 디자이너에 가까웠다.
정답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닐 때도 있다. 가장 논리적인 답이 항상 가장 좋은 답인 것도 아니다. 각각의 문제마다 각각의 해결책이 있고, 때론 즐겁고 엉뚱한 해결책이 좋은 답이 될 수도 있다. 논리와 체계는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래도 가끔 머릿속이 경직될 때, 길 산스 울트라 볼드 i를 떠올려본다. 오목한 쟁반 위 비대칭으로 놓인 구슬이 구르는 듯한, 과도하지 않으면서도 기발한 저 해결책을. 그러면 긴장이 풀리고 웃음이 나고 용기가 생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