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연배우 강태기를 비롯해 송승환·최재성·최민식·조재현 등 순수와 광기를 오가는 17세 소년 ‘알런’을 거쳐간 배우들은 모두 연극계를 대표하는 스타가 됐다. 올해의 ‘알런’도 예사롭지 않다. 지난 봄 예술의전당 기획연극 ‘페리클레스’에 아버지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동반출연해 주목받았던(31)와 국내 최초의 10대 알런이자 ‘세계 최연소 알런’으로 화제몰이중인(17)가 그들이다.
“알런은 배우가 뿜어내는 열정 그 자체” 14살 차이 두 알런은 전혀 달랐다. 대입 수시가 며칠 남지 않아 “큰일났다”는 고3 수험생는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사춘기 소년 그 자체. 2012년 영화 ‘범죄소년’으로 도쿄국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고 김기덕 감독의 영화 ‘뫼비우스’ 등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았지만, “첫 연극이라 떨린다”고 했다. “상이라곤 태권도 겨루기 상밖에 못 받아봤다”는도 앳된 외모는 큰 차이가 없었다. 서른을 갓 넘겼고, 무대 경력도 3년이 채 안된 풋풋한 신인이다. “저 나이에 이런 겁나는 역을 맡아 버티는 게 대단하다. 나라면 감히 못했을 것”이라고 겸손히 말했지만 여유있는 태도에서 배어나오는 자신감은 감출 수 없었다. 작품을 향한 진심과 역할에 대한 깊은 이해도 각자 뚜렷했다. ‘같은 작품 다른 무대’를 둘 다 놓칠 수 없는 이유다.
어려운 역할인데 어떻게 용기를 냈나요.(이하 서): 용기가 아니라 욕심을 냈는데 기회가 왔어요. 원래 20~30대 배우들 대상으로 오디션을 했는데, 주위에 해보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얘기하고 다녔더니 막판에 한번만 보자고 연락이 왔어요. 그렇게 하는 거 아니라고 혼도 났는데, 저를 뽑아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거기 보답하려고 용기내서 열심히 하고 있어요.(이하 남): 남자 배우로선 누구나 한번쯤 해보고 싶은 로망이니까요. 운 좋게 기회가 왔는데, 다른 선생님들은 이미 하셨던 분들이라 다 꿰고 계시고 저희는 그 흐름을 타야 하니 정신없이 쫓아가느라 바빴습니다.
알런은 굉장히 정서가 불안한 소년인데, 매력이 뭘까요. 서: 다들 정서불안이라 생각하지만 제 생각엔 순수한 사춘기 소년일 뿐이거든요. 알고 보면 아픔이 있는 아이고, 이런 상황에 놓였다면 다들 그랬을 거라고 공감하게 하는 것 같아요. 남: 배우가 무대에서 뿜어낼 수 있는 열정이 알런을 통해 잘 나열돼 있거든요. 역할 자체가 갖는 빠른 감정변화와 이면성,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관객을 이해시키는 스킬도 필요하고. 그런 부분이 배우로서 도전해보고 싶은 과제이자 매력인 것 같아요.
말을 자기만의 신처럼 사랑하다가 어느 순간 거기 도전하는 심리에 공감이 되나요. 서: 저는 도전이 아니라 말을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거 같아요. 말만 사랑하다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됐는데, 하지만 말도 너무 사랑하니까 이런 모습 보지 말라고 눈을 찌른 거라고 이해하고 있어요. 남: 공감이 쉽지는 않죠. 하지만 배우로서 최대한 가까이 가야되니 다른 경험들을 가져와서 퍼즐조각처럼 감정을 맞춰가요. 무대에 올라가도 100% 완성은 아닐 것 같아요. 끝나는 날까지 모자라는 1% 를 채우려 계속 노력해 가는 게 연극이겠죠.
굉장히 순수하고 원초적 역할인데, 그런 면이 좀 남아 있나요. 남: 사실 알런 하면서 내가 때가 많이 묻었다는 생각을 했어요. 전에 ‘로미오와 줄리엣’을 할 때도 순수하고 조건없는 사랑을 해야 되는데, 얘들이 왜 사랑에 빠졌을까를 따지게 되더라구요. 알런을 하면서도 순간순간 성인인 저의 감정을 표출하고 있는 게 느껴지는데, 내 안에 남아있는 순수함을 찾아가는 과정 같아요. 그에 비해 영주는 아직 연애경험도 없고 술도 안 마셔 본 고등학생이니까. 다수의 연애경험과 모든 걸 접해본 저로서는 사실 그 순수함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네요(웃음). 서: 저도 나름 순수하지 않아요(웃음). ‘범죄소년’ 같은 어두운 작품만 했으니…저도 이걸 하면서 진짜 열일곱 살로 돌아온 것 같아요. 형이랑 애들처럼 장난도 치고….
“알런의 노출은 자유와 해방의 상징” 더블캐스팅이지만 연습은 늘 함께했다. 첫 리딩 때부터 하루 8~9시간씩 줄곧 같이 하면서 서로의 연기를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대충 해도 잘 하는 형이 더 열심히 하니 진짜 알런이 돼가는 것 같다. 매번 새로운 걸 꺼내놓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하다”고 치켜 세우는에게는 “영주는 백지에 그림 그리는 느낌”이라 응수한다. “아무 것도 지울 필요없이 그리고 싶은 걸 그리면 되는 깨끗한 상태가 알런 역에 잘 맞는 것 같아요. 감정기폭이 심한 역이라 배우가 자칫 테크닉에 기대기 쉬운데 알런은 그렇게 가면 안되거든요.” (남)
나만의 알런에 대한 욕심도 있겠어요. 남: 관객들도 그런 걸 기대하시겠죠. 초반에는 욕심을 많이 내서 정말 매일 새로운 카드를 꺼냈어요. 근데 어쨌든 남는 건 알런의 본질과 진심이더군요. 그외 사족은 다 들어냈습니다. 서: 저도 그 본질을 찾고 있어요. 아직 10대가 한번도 없었으니까 10대 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찾고 싶구요.
‘에쿠우스’가 40년 동안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는 뭘까요. 서: 알런을 보는 재미도 있지만 다이사트를 보는 재미도 있다고 생각해요. 항상 다른 배우를 보는 재미 아닐까요. 남: 이번 다이사트 두 분만 해도 느낌이 전혀 달라요. 안석환 선생님은 날카롭게 파고드는 에너지, 김태훈 선생님은 크게 품어주는 느낌이죠. 배우들의 연기도 작품의 맛이지만 관객을 끌어당기는 건 작품의 힘이라 봐요. 요즘은 사는 게 힘들다보니 문화도 여가 즐기기 위주가 됐지만,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도 반드시 필요한 거니까요.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려 이름도 바꿨다는는 ‘페리클레스’ 이후 부자관계가 밝혀져 오히려 아버지를 극복할 수 있게 됐단다. “숨기고 살 때보다 부담감이 없어지고 오히려 거리낄 게 없네요. 아버지에게 저를 더 보여줄 수 있었기에 틀을 벗어나 배우로서 한 단계 나아갈 수 있었구요. 이제 관객들에게 인정받는 방법은 제가 무대에서 잘하는 것뿐이겠죠.” “평생 배우를 할꺼라면 연극이 베이스가 돼야 한다”는 생각으로 무대에 오른다는 그는 “셰익스피어를 워낙 좋아해서 고전극에 욕심이 난다. 햄릿, 오이디푸스, 뜨레블레프 등 남자 배우가 꿈꿀수 있는 역할은 다 해보고 싶다”고 했다. 무대에서 쌓이는 에너지가 인간적으로도 깊어져 연기에 묻어날 거라는 믿음에서다. 대학에 가서도 무대에 설 것이라는 역시 “셰익스피어를 하고 싶은 건 어쩔수 없다”고 말한다. “지금은 너무 부족한 점이 많아 폐 끼치는 것 같아 죄송스러워요. 리딩 때도 제가 한 장 넘기는데 두 시간이 흘러갔으니까요. 그렇게 힘들었는데 할수록 재미있네요. 그게 한번 빠지면 못 헤어나오는 연극의 매력인 것 같아요.”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극단 실험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