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욘드 스테이지] 서울시극단 올해 첫 작품 ‘욘’
배우 이남희 8년여만의 무대 복귀작
세종문화회관(사장 안호상)의 올 시즌을 여는 서울시극단의 첫 작품 ‘욘’의 주인공이다. 수공업 시대에서 산업화 시대로 이행하던 19세기말 성공한 은행가였지만, 불미스런 사건에 휘말려 은행 파산의 책임을 지고 16년간 세상과 단절되어 있었던 사람이다. 그래선지 현대인의 눈에 부적절할 뿐 아니라 당대의 변화도 적응하지 못해 가족·친구와도 충돌한다. 각색·연출을 맡은 고선웅 예술감독이 8년여 무대에서 볼 수 없었던 이남희 배우를 캐스팅해 손수 직조해낸 캐릭터다.
‘욘’은 ‘현대극의 아버지’라 불리는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만년(晩年) 걸작이다. 1897년 발표되자마자 유럽 각지에서 앞다퉈 무대화했고, 지금도 전세계에서 꾸준히 공연되고 있다. 페미니즘 연극의 효시 ‘인형의 집’으로 유명한 입센은 ‘사회문제극’의 창시자이자 전통적인 관념에 도전한 점을 높이 평가받으며 전세계에서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많이 공연되는 작가다. 하지만 세계적 위상에 비해 한국에선 보기 힘들었는데, 2년 전 연극평론가 김미혜 한양대 명예교수가 국내 최초로 입센 전집을 번역해 접근이 한결 수월해졌다. 김 교수는 그 공로로 지난해 노르웨이 왕실이 주는 훈장을 받기도 했다.
김 교수에 의하면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주며 관객의 감성을 건드리는 체홉에 비해 입센은 도전의식과 질문을 던짐으로써 관객을 불편하게 한다. 그런 이유로 그간 한국에서 푸대접을 받아왔다”는데, 서울시극단의 ‘욘’은 ‘입선웅(입센+고선웅)의 탄생’이라고 할 만큼 독특한 해석이라 흥미롭다. 비극조차 유머러스하고 리드미컬하게 풀어내는 ‘고선웅 스타일’과 입센이 제대로 만나 불편함보다 골계미가 넘치는 무대가 된 것이다.
16년간 과거의 영광만 되새김질 하고 있는 욘, 가문의 명예 회복을 위해 아들 엘하르트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는 욘의 아내 귀닐, 욘의 옛 연인이자 귀닐의 쌍둥이 언니로 실패한 사랑을 조카에게 투영하는 엘라의 막장드라마 삼각구도로 시작해 사각, 오각구도로 발전해 가는데, 시종 ‘부적절’해 보이는 부조리한 상황의 열전이 마치 개그 콘텐트 ‘꼰대희’를 보듯 웃음보를 빵빵 터뜨려준다.
뭉크, 연극에 매료돼 ‘밤의 방랑자’ 그려
고선웅 연출이 ‘눈보라치는 고독 속에서’라는 부제를 붙인 것처럼, 흔히 ‘욘’은 인간의 절대고독에 관한 이야기로 풀이된다. 내면의 고독을 화폭에 토해냈던 노르웨이의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드 뭉크도 그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세계관에 매료되어 ‘병든 늑대’와 같다고 묘사된 욘과 자신을 동일시한 자화상 ‘밤의 방랑자’를 그렸다는데, 그 사무치는 고독의 미학이 아이러니하다.
숭고미를 극대화한 엔딩은 명품 반열에 오른 고선웅의 대표작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을 연상시킨다. 역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였던 ‘조씨고아’의 정영이 20년간 칼을 간 복수를 이룬 뒤의 허무를 장엄하게 연출했다면, 욘도 16년 만에 과거의 굴레를 털어냈을 때 비로소 숭고해진다. 오랜 고립에서 스스로를 해금시키고 세상에 나와 엄청난 눈폭탄을 맞는 4막의 충격적인 미장센과 배우 이남희의 열정적인 연기가 연극만이 줄 수 있는 감동을 웅변하는 듯하다.
드라마 ‘부적절한 것에도 정도가 있다’는 80년대 ‘꼰대’였던 오가와가 2024년에 다녀온 뒤 달라진 자신을 발견하고, ‘비정상의 정상화’를 실천하며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켜갈 것이라는 암시로 끝난다. ‘꼰대의 부적절’을 비난하기보다 다른 사람을 관용의 눈으로 바라보자는 제안이 퍽 인간적인데, 부적절의 극치 ‘욘’의 메시지도 다르지 않다.
고선웅 연출은 “눈보라 치는 산꼭대기에서 더 올라가려고 하는 욘의 처지가 이 시대를 사는 시지프스처럼 보여 잘 연출해보고 싶었다”면서 “더 오를 곳이 없는데도 자꾸만 올라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 지름길로 바쁘게 가다 보니 주위도 못 살피게 되지만, 자신의 삶도 되돌아보고 남의 삶도 헤아리지 않으면 인생이 고독하고 막막해진다는 이야기를 입센이 하고 있다. 서로 매너를 지켜가면서 너무 싸우지 말고 분란 없이 살다 가자는 이야기”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