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와 친구들
강국진은 1939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도쿄에서 대학을 나온 부친과 서울에서 여고를 마친 어머니, 엘리트 집안이었다. 강국진은 진주에서 태어나기만 했을 뿐 부친의 직장을 따라 함양 등 여기저기로 삶터가 바뀌었다. 강국진은 네 살이 될 때까지 도통 말이 없었다. 벙어리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어 병원에 데려갔더니 의사가 다짜고짜 아이의 뺨을 때렸다. 아이가 울자 벙어리는 아니니 안심하라는 너무나 간단하고 싱거운 진단이 돌아왔다.
1971년 합정동에 국내 첫 판화교실
1944년 강씨 집안은 부산에 정착했다. 강국진은 1946년 서면의 성지국민학교에 입학한 후 3학년 때 집 가까이에 있는 가야리의 동평국민학교로 전학한다. 금성중학교를 거쳐 동래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동래고의 미술교사는 그림에 소질이 있던 강국진을 경남여고의 미술교사 하인두(1930~1989)에게 보내었다. 고교생 강국진은 하인두와 청맥화숙의 추연근(1922~2013), 두 화가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하인두와는 나중에 한성대에서 함께 교수 생활을 하는 인연으로 이어진다.
강국진은 미술 공부는 혼자서 해도 된다는 생각으로 고교 졸업 후 미대에 진학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목수를 불러 강국진의 이젤을 만들어 주었다. 그랬는데 미대에 진학한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점점 독학인 자신의 한계가 느껴졌다. 1960년의 겨울이 올 무렵 상경한 그는 서울미대 2학년생인 김차섭(1940~2022)을 소개받았다. 김차섭은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어 학비에 보태려고 했는데, 마침 강국진이 실크스크린의 기술자라는 소문을 들었다. 강국진은 고교 졸업 후 3년간 더 부산에 머물 때 실크스크린 기술을 배웠던 모양이다. 손으로 그린 것과 달리 실크스크린 판화 기법으로 깔끔하게 제작한 크리스마스 카드는 세련된 감각을 풍겼다. 많이 팔려 나갔다. 그런데 자금 회수에는 실패했다. 강국진은 1961년에 홍익대에 입학한다. 이번에는 김차섭과 함께 한쪽 길이가 50㎝ 정도 되는 양철판 위에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한 광고판을 버스와 전차 안에 붙이는 사업을 하였다. 두 사람은 제법 큰 돈을 만졌다. 나중에 뉴욕으로 간 김차섭은 판화가로서도 이름을 날리게 되는데 판화를 제작할 때마다 꼭 에디션 한 점은 강국진에게 보내어 주었다.
강국진은 대학에 입학하기 전부터 이미 역량을 가진 실크스크린 판화가였다. 판화는 한편으론 공학과도 가까운 데가 있는데, 어릴 때부터 뭘 만들기를 좋아했던 강국진에게는 체질적으로 잘 어울리는 장르였다. 대학을 졸업한 강국진은 4년간 명동에서 인테리어 사무실을 운영했다. 그러다가 합정동에 작업실을 구하면서 미술에 더욱 전념하게 되었다. 이미 실크스크린으로 판화에 익숙한 강국진이었지만 당시 드물게 동판화를 제작하던 김상유(1926~2002)의 권유로 판화에 더욱 매진하게 되었다. 강국진은 1971년, 합정동 작업실에다 국내 최초로 판화교실을 열었다. 김상유, 이상욱(1923~1988) 등과 함께 판화를 보급하는 활동을 했다. 김구림과 함께 인쇄소를 다니며 판화제작에 필요한 공구를 구했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국내에 판화 재료와 도구가 거의 없었다. 나중에 홍익대 판화가 교수가 된 곽남신(1953~ )은 대학생 때 메조틴트 판화를 공부하고 싶었는데 마땅히 기법을 배울 데가 없었다. 1970년대의 홍익대에는 유강열 교수가 판화를 가르치긴 했지만 판종은 실크스크린과 목판에 한정되었다. 곽남신이 대학 4학년 때, 홍대 1년 선배인 김선(1949~2015)이 강국진을 소개해 주었다. 김선은 강국진과 함께 자주 등산을 다닐 정도로 둘의 사이가 돈독했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강국진은 세상 물정에 밝은 김선에게 많은 걸 의지하곤 했다. 강국진은 버니셔, 스크래퍼, 니들 등 메조틴트에 필요한 도구를 거의 자체적으로 제작했다. 니들은 치과 도구를, 프레스기는 국수틀을 변형시켜 만들었다. 큰 로커는 손수 제작 가능한 도구가 아니었기에 자그마한 수정용 로커를 구해다가 작업했다.
전남 해남 출신의 황양자(1949~ )는 중앙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대학원에서 논문을 쓸 무렵에는 연남동 큰 언니 집에서 살았다. 근처 동교동에는 대학 선배인 박동인의 화실이 있었는데 어느 날 가 보니 그 공간이 반으로 나뉘어 한쪽에 ‘강국진화실’이란 간판이 걸려 있었다. 판화 프레스기가 있는 화실은 공장을 연상케 했다. 화실의 주인인 강국진이 비스킷과 함께 커피를 내왔다. 과묵한 인상과는 달리 섬세한 몸가짐이었다. 그 감동은 결혼으로 이어졌다. 1975년, 두 사람은 동교동 화실에 소꿉장난 같은 살림을 차렸다. 강국진은 전기곤로에 냄비 밥을 만들었다. 밥이 되면 냄비 위에 은박지를 덮어 뜸을 들였다. 멸치 육수에 두부와 호박을 반듯하게 썰어 넣어 된장찌개를 만드는데 맛이 기막혔다. 강국진은 손이 바지런하여 음식도 잘하고 목공 일도 잘했다. 다시 태어난다면 목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53세에 별세
판화가들이 대체로 그렇듯, 강국진의 생활 습관은 반듯했다. 오전 6시에 일어나서 약한 불의 가스레인지 위에 명태 대가리와 싸라기 쌀로 개밥을 올렸다. 개 세 마리를 끌고 근처 검단산으로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면 EBS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불어 공부를 했다. 담벼락을 고치거나 잔디를 다듬고 나서 샤워를 했다. 강의가 늦은 날의 오전은 집에서 그림을 그렸다. 철조각을 제작하기도 했다.
아이스크림은 못 참았지만, 좋아하는 커피는 당뇨를 걱정하여 반 잔만 마셨다. 그럼에도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2018년에 제정된 강국진 판화상은 강국진 미술상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평생 몇 마디 하지 않았던 과묵의 강국진이 떠난지 30년, 그를 향한 후배들의 열렬한 관심과 발언으로 이제는 한국현대미술사의 왁자지껄한 주인공 강국진으로 언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