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5대 명산’ 장흥 천관산
정남진(正南津)이다. ‘광화문에서 정동 쪽에 있는 나루’라고 해서 정동진이라고 부르듯, 정확히 남쪽에 있어 정남진이라고 한다. 광화문에서 남쪽으로 341㎞ 직진하면 우리 뭍의 어느 끝에 다다른다. 영화 ‘파묘’ 속 대사처럼 경도와 위도를 쏟아내면 ‘126.59, 34.32’다. 전남 장흥군 관산읍 신동리에 좌표가 찍힌다. 정서진(인천시 서구)·정북진(자강도 중강진)도 없을 리 없다. 봄바람 좀 먼저 마중한답시고, 흥(興)이 일어 그 먼 남쪽을 찾았다.
조선왕조실록선 ‘대장봉 움직였다’ 기록
지진이었을까. 신하들은 왕에게 ‘수성(修省·마음을 가다듬어 반성함)하시라’고 조언했다. 1672년은 최대 80여만 명이 사망했다는 경신대기근(1670~1671년) 직후다. 이미 1500년대부터 접어든 ‘소빙기(小氷期)’의 결정판이었다. 17세기 실록에 유난히 천재지변 기록이 많은 건 이 소빙기 때문이다. 실록에 나온 전체 천재지변 2만5000여 건 중 유성 50%, 때아닌 눈 45%, 해일 30%, 먼지 90% 등이 이 시기에 일어났다. 자연재해는 왕의 부덕함 탓이라는 재이사상(災異思想)이 지배하던 때, 현종은 신하들의 조언에 ‘그러하겠다’고 대답했다. 흉흉한 민심이 ‘바위가 움직였다’는 말을 만들어 왕에게 전했는지도 모른다.
350여 년 뒤 같은 3월(실록 상의 2월은 음력)이었다. 초속 9m의 바람이 불었다. 기온은 높지만, 바람이 강할 것이라는 올봄 예보 그대로였다.
“다행입니다. 이렇게 센 바람이 불어줘서요.”
장승배(62·서울 동작구)씨는 “덕분에 황사가 싹 걷혔다”고 좋아했다. 천관산은 근처 덕룡산·달마산·두륜산과 더불어 당일치기든 1박 2일에 걸치든 ‘한 번’에 오르는 산이기도 하다. 주로 100대 명산 타이틀을 겨냥하는 이들이 택하는 ‘1타 4피 산행 세트’다. 장씨도 이틀 전 덕룡산과 달마산에 다녀왔단다.
하지만 기괴한 바위들로만은 모자라다. 호남의 기암 하면 월출산인데, 굳이 비교적 낮은 천관산을 쳐주는 이유는 바위라는 풍성한 반찬을 입가심해줄 조력자들이 많아서다. 어우러지고 더불어 하는 것들. “바위와 바다, 나무와 길. 바람까지 불어 천관산의 오늘은 완벽해요”라며 하산한 장씨의 말에 답이 있었다.
바람이 잦아들었다. 서울에서 온 30대 남성이 산 아래 떨어진 동백꽃처럼 빨갛게 상기돼 올라왔다. “어휴, 산 아래는 더운데, 정상 쪽은 아직도 겨울인가 봅니다.” 그는 그러면서 억새군락지를 지났다. 가을 억새, 겨울 동백을 지나 봄 진달래가 천관산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비 많고 따뜻한 겨울을 지내 서둘러 필 것 같았던 꽃은 어쩐 일로 웅크리고 있었다. 바람이 꽃을 막고 있나 보다.
국내 유일 안중근 의사 모시는 사당도
산 아래 남쪽 뭍에 높이 46m 정남진전망대가 보인다. 장흥이 정남진으로 인정받은 건 2001년 4월이다. 당시 장흥군이 관산읍 신동리를 콕 짚어 의뢰했더니, 국립지리원(현 국토지리정보원)이 ‘광화문에서 남쪽 끝이 맞다’고 답했다. 신동리 이외 지역도 ‘정남진’을 앞세워 브랜드화했다. 치킨집 간판에도 붙었고, 학교는 이름을 바꿨다.
그런데 정남진-광화문-중강진을 잇는 경도 126° 라인에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치른 만주 하얼빈도 걸린다. 장흥에는 유일하게 안중근 의사를 모시는 사당 해동사(海東祠)가 있다. 장흥의 죽산 안씨 문중에서 1955년 안중근(순흥 안씨) 의사를 모시는 곳이 없어 안타깝다며 지었다. 정남진전망대에는 한 기업인이 세운 안중근 의사 동상도 있다. 이래저래 우연과 필연이 얽히고설켜 스토리텔링이 됐다. 정남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관산 너머로 해가 넘어갔다.
“내일 아침 소등섬에 한 번 가보세요. 괜찮을 겁니다.”
정남진전망대에서 만난 로컬(지역민) 이동현(20)씨가 추천해줬다. 소등섬은 일출 사진을 찍기 위해 사람들이 줄 선다는 곳. 일출 시각 오전 6시 40분. 회갑 기념 여행 중인 박모(60·서울 종로)씨가 여섯 살 아이처럼 발을 동동거리며 일출 샷을 남겼다. 마침 일 나가는 배가 뜨는 해 아래로 둥둥거리며 지나갔으니 사진에 주연과 조연을 모두 담았을 테다. 박씨는 바다에 바짝 붙은 정남진해안도로를 지나 순천으로 향했다.
이청준이 소설에 그린 회진포 앞 선학동은 곧 펑펑 터진 유채꽃으로 가득할 것이다. 한승원 작품의 밑거름이 된 보림사(寶林寺) 뒤편 비자나무 숲 그림자도 짙어질 것이다. 다시 서울로 341㎞를 거슬러 가는 길. 정남진에 언제 다시 갈 수 있을까. 천관산이 아득해진다.
* 마지막 두 문장은 각각 한승원의 시 ‘보림사 가는 길’, 이청준의 소설 ‘선학동 나그네’ 중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