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글와글, 와인과 글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지만, 배는 항구에 머물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파올로 코엘료의 책 『순례자』에 나오는 한 문장이며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코엘료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던 길에서 영감을 받아 최초로 발표한 작품이기도 하다. 과거에 겪은 실패 때문에 또 다시 실패할까 두려워하는 것이고, 과거에 쟁취한 것을 잃을까봐 두려운 것이라고 작중 인물의 입을 빌어 작가는 말한다.
나도 마침내 스페인 북쪽 빌바오 공항에 내렸다.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구겐하임 박물관과 제프 쿤스의 작품 퍼피 덕분에 도시재생의 상징과도 같은 도시 빌바오를 두 발로 만났다. 산세바스티안이 세계적인 미식 도시로 유명하지만 빌바오의 골목길에도 핀쵸스 바가 즐비하다. 핀쵸스란 얇은 꼬챙이로 빵 위에 얹은 해산물이나 고기, 버섯 등을 안정적으로 지탱하는 형태의 가벼운 스낵으로 스페인 다른 지역에서 타파스라 부르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바스크 지방 특유의 음식 문화이다. 핀쵸스에는 ‘챠콜리’(Txakoli)라 부르는 바스크 지방 특유의 화이트와인을 곁들이는 게 보통인데, 마치 폭포처럼 높은 곳에서 와인 잔에 포도주를 따르는 묘기가 특징이다.
마침 점심 때여서 차를 몰고 국도의 식당에 들어갔다. 바스크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곳으로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 곳. 옆 테이블에서 먹는 음식을 참조해 주문했더니 대구와 새우, 조개를 넣고 끓인 생선탕이 빵과 함께 나오는데 맛도 일품. 인근 공사장에서 일하다 식사하러 온 한 무리의 남자들은 바스크어로 말하고 있었는데 태어나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언어였다. 식사에 붉은 포도주를 곁들이고 있었다. 포도주에 물인지 토닉워터인지 타서 마시는 모습이 달랐을 뿐이다. 마치 헤밍웨이 소설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빵 한 조각과 평범한 포도주 한 잔이 주는 소박한 행복의 현장이다.
팜플로나에 마침내 도착했다. 기자였던 헤밍웨이가 작가로서 재탄생할 수 있었던 운명의 장소, 그가 이 도시를 처음 찾은 1923년 이후 꼭 100년 만에 내가 방문한 것이다. 성난 황소와 함께하는 축제인 ‘산 페르민’이 7월에 열리기 때문에 폭풍 전야의 고요함 같았다. 헤밍웨이는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됐지만 그가 커피와 와인을 마시며 작품을 구상하던 카페 이루냐는 여전히 성업 중이고 친구들과 술 마시던 근처 골목길은 와인잔을 든 사람들로 가득했다. 친구들과 송어 낚시하던 강가를 지나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했다.
피레네가 얼마나 거대한 산맥인지 스페인과 프랑스 국경을 세 번 넘나들며 실감할 수 있었다. 대부분 순례자의 출발 장소인 생장피에드포르와 비아리츠를 거쳐 해안 도시 비다르(Bidard)에 도착했다. 프랑스쪽 바스크 지방의 작지만 아름다운 휴양 도시다. 골목마다 가게마다 모든 게 반짝거린다. 이곳 사람들이 얼마나 부지런한지 짐작할 수 있다. 숙소 주인의 권유로 마신 이룰레기(Irouleguy), 스페인 바스크의 영혼이 담긴 술이 챠콜리라면 프랑스 바스크 지방에서는 이룰레기 와인이다.
다시 차를 몰고 산세바스티안, 바스크 이름으로는 도노스티아. 이곳의 콘차 해변의 핀쵸스 바에 헤밍웨이 주인공처럼 혼자 앉았다. 작품 속에 샤토 마고를 주문해 마시는 장면으로 주인공의 심리를 묘사하고 있었다. 세상은 조용하고 나를 아는 이는 한 명도 없다. 주류와 궤도에서 일탈한 고독한 여행자다. 달콤쌉쌀한 익명성이 곧 자유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옆자리에 앉은 아돌포라는 이름의 바스크 남자와 대화를 나누다 한 잔 건넸더니, 그는 내 등을 살짝 치더니 두 잔을 산다. 와인은 풍성하고 글의 영감이 샘솟게 만드니 바스크는 ‘와글와글’의 진정한 고향인 듯싶다. 보이지 않은 여행 가방을 그곳에 남겨두고 왔다. 가방 찾으러 간다는 핑계로 언젠가 다시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