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포퓰리즘발 ‘부채 쓰나미’ 남의 일 아니다

중앙일보

입력 2023.05.27 00:28

SNS로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전 금융위원장

“온 세계가 무절제하고 무책임한 정책 여파로 국가 부채에 무감각한 ‘재정적 환각 상태 (Fiscal Fantasyland)’에 빠져들고 있다.” 영국 경제 전문지 이코노미스트가 얼마 전 표지 기사로 전한 예사롭지 않은 경고 메시지로 빚 무서운 줄 모르는 여러 정부와 정치인들에 대한 질타다. 고금리 후폭풍, 과도한 위험 대출의 부메랑,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보다도 나빠진 주요국 재정 상태, 그리고 장기간 지속돼 온 초저금리로 부채 증가의 부담에 둔감해져 ‘공짜 돈 환상’에 젖었다는 지적이다.
 
전 세계가 빚잔치 후폭풍 시달려
최근 부채 급증한 한국도 예외 아냐
노동·규제 개혁 등 혁신 실천하고
민간투자 활성화로 성장 촉진해야
 

선데이 칼럼

전 세계가 2차 대전 이후 가장 부채가 많은 시기를 맞은 오늘날, 과거 저금리 상황에서 겁 없이 벌린 빚잔치의 후폭풍으로 지난해 이후 급속히 올라간 고금리 파도가 몰려오고 있다. 나아가 이코노미스트 최근호는 심층 분석 기사를 내놓고 있는데 현재와 같이 ‘명목 이자율이 명목 경제 성장률보다 높은 상황’에서는 국가든 기업이든 차입자 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다는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다. 지난 정부 5년간 급증한 국가 부채의 유탄을 맞은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반복적 경제위기의 대명사가 된 아르헨티나가 또다시 국제금융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 연간 100%가 넘는 극심한 물가 상승률과 이로 인한 페소화 가치 폭락을 떠받치기 위해 기준금리를 97%로 올렸다는 뉴스다. “벽지 대신 지폐로 도배를 한다”는 현지 주민 인터뷰를 실은 외신 보도는 뿌리 깊은 인기영합적 정책의 폐해를 극적으로 보여 준다. 100년 전 선진국 반열까지 올랐던 아르헨티나의 비극은 사회정의로 포장된 포퓰리즘 정책이 빚은 재정파탄에서 비롯됐고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의 단골손님으로 전락했다. 반시장적 정책의 덫에 걸려 역대 아홉 번이나 디폴트(국가 부도) 위기를 겪은 아르헨티나의 몰락은 페론주의(Peronism) 폐해에 기인한다. 페론주의는 20세기 중반 두 차례 집권한 후안 페론 대통령과 부인 에바 페론이 내세운 대중 영합적 경제사회정책과 이념을 일컫는 단어로 복지 확대, 노동자 임금 인상, 산업 국유화, 외국 자본 배척 등 내용을 담고 있다. 포퓰리즘의 원조 격인 페론주의의 결과는 헤어날 수 없는 부채 함정과 살인적 물가였다.
 
포퓰리즘이 국가 재정을 악화시킨 사례는 남미나 남유럽 등 여러 나라에서 두루 찾을 수 있는데 공통점을 챗GPT는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로 과도한 임금 인상과 소득세 인하 정책, 둘째는 재정 부담을 수반한 대규모 고용 창출 정책, 셋째는 국영 기업의 국유화와 공공기관 부실화 등이 대표적 포퓰리즘 요소로 꼽힌다. 지난 정부 5년간의 대표 정책을 빼닮은 듯해 안타깝다. 경제위기 주범이자 위기 극복의 수단을 무력화하는 재정파탄은 우리나라와 같은 비기축 통화국의 최후의 보루를 무너뜨리는 재앙이다.


종류가 다르지만 국가 부채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 주는 미국 의회의 부채한도 협상도 자칫 세계경제와 국제금융시장에 파장 소지가 크다. 부채한도를 의회가 정하는 제도는 세계 1차대전을 겪으면서 정부의 재정 지출에 신축성과 함께 책임성을 부여할 목적으로 1917년에 도입됐다. 현재 하원을 장악한 공화당과 민주당이 정부 지출예산 삭감을 놓고 협상에 난항을 겪고 있으나 지금까지 한 번도 미 정부 디폴트가 발생한 적은 없었다. 2011년 오바마 행정부 기간 중 하원을 장악했던 공화당의 반대로 한도 확대에 합의가 미뤄져 거의 디폴트 사태가 발생할 뻔한 적은 있었다. 당시 사상 첫 미국 국가신용등급 하향 조정과 정부 차입비용 증가를 초래했고 주식시장 폭락 등 금융 혼란을 키웠던 사태 이후 지금 다시 야당이 하원 다수당인 상황을 맞고 있다. 현재로선 타결 가능성 전망이 지배적이나 미국 부채한도 관련 정치적 갈등은 본격적 경기하강의 전주곡이라는 블룸버그 통신의 최근 지적과 세계 3대 신용평가기관인 피치가 미국 신용등급 강등을 언급한 것처럼, 국가 부채 증가의 심각한 경제적 충격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세계 4대 경제국이자 유럽 경제의 기둥인 독일은 재정 관리가 가장 엄격한 선진국으로 꼽힌다. 재정 준칙을 헌법에 규정한 독일은 8년간 정부부채 비율을 20%포인트 줄였고 1조 유로(약 1400조원)에 달하는 천문학적 통일 비용을 철저한 균형 재정 기조로 뒷받침해 왔다. 독일어 ‘Schuld’는 ‘빚’과 ‘죄’의 뜻을 동시에 지닌 단어로, 방만한 재정 운영은 미래 세대에게 빚을 떠넘기는 죄를 짓는 것이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지난주 국제행사에서 대담을 나눴던 마리오 드라기 전 이탈리아 총리는 무리한 복지 지출을 통제하지 못하면 재정 수지 악화는 불 보듯 뻔하고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기후변화 대응에 따른 재정 지출 확대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국가 부채 줄이는 길은 ‘성장’뿐이라고 했다. 재정 부담 없는 경기 대책인 노동·규제 개혁 등 혁신과제 실천과 민간투자 활성화로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것이 포퓰리즘의 후유증을 막는 지름길이다. 지난 주말 치러진 총선에서 최저임금 대폭 인상과 근로시간 파격 단축을 내건 정당을 제치고 개혁과 친기업 정책을 내건 정부를 택한 그리스의 반전이 보여 주듯이 국민의 옳은 선택이 부채의 덫을 벗어나는 바른길이다.
 
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전 금융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