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시네마 역사
악을 쫓다가 스스로 악마로 변해
조코 위도도 대통령의 등장 이후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역시 엄청난 희생이 따랐던 나라이다. 수하르토 집권기가 그랬다. 그는 1965년 쿠데타로 집권한 후 수도 자카르타가 있는 자바 섬에서만 100만 명의 공산주의 혹은 공산주의자로 간주된 자, 지식인, 그리고 중국인을 학살했다. 수하르토는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를 독립시킨 건국의 아버지 수카르노 정권을 쓰러뜨렸는데, 수카르노가 친중 노선이고 공산주의 이념에 친화적이라는 이유를 내세웠다. 사실은 군부 내 좌익 세력이 우익 장군 7명을 처단하려는 과정에서 수하르토는 간신히 살아남았고 그 보복으로 일종의 역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이후 나라 전체를 학살로 몰고 갔다.
그 끔찍한 기억은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촉망받는 여성감독 카밀라 안디니의 2022년 영화 ‘나나’에 고스란히, 그러나 매우 서정적인 시각과 미감으로 담겨졌다. 영화에서 주인공 나나(해피 살마)는 늘 악몽을 꾸는데, 자신은 어디론가 도망을 가고 있고 뒤에서 따라 오던 아버지가 수상쩍은 청년 몇 명에게 칼로 목이 잘려 나간다는 내용이다. 사람들은 나나의 꿈속에서든 현실 속에서든 숨죽여 속삭인다. 이웃집 아낙은 마을 사람들에게 얘기할 때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한다. “아, 글쎄 그 남자가 공산당이었대요.” 나나는 언니한테 물어본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우리를 쫓아오는 거야?” 식민 지배를 막 벗어난 이들에게는 여전히 네덜란드 군대가 공포의 대명사였던 시절이다.
우리에게도 아픈 기억이 있다. 그 규모가 비교할 수 있는 것이든 아니든, 5·18의 아픔은 지구상의 다른 시공간에서 일어났던 학살의 기억과 겹쳐진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기록한 이창동 감독의 1999년 영화 ‘박하사탕’이 위대한 것은 가해자의 시선으로 5·18을 그렸다는 ‘따위’가 아니다. 그의 영화는 학살(자)의 내면, 그 악마성의 심연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걸작의 반열에 올라 있다. 광주에서 계엄군으로 투입됐던 주인공 영호(설경구)는 그것이 오발이었든 아니면 알고도 발사했던 것이든 여고생을 사살했다. 그 트라우마와 콤플렉스가 오히려 자신을 공안과 형사가 되게 했고 운동권 학생을 ‘때려잡는 일’에 앞장서게 만들었다. 형사를 그만 둔 뒤에는 작은 중소기업을 운영하며 아무런 일 없이 살아가는 척 하지만 아내의 외도와 사업 실패로 점점 더 막장의 인생이 되어 간다. 그는 자신 안에 있었던 악의 심연을 깨닫게 된다.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쫓다가 스스로 악마가 됐던, 그 역할에 앞장섰던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건 실로 끔찍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영호는 가리봉동 ‘공돌이’ 청년 시절, 자신의 첫사랑 순임(문소리)과 소풍을 갔던 진소마을(충청북도 제천시 백운면 애련로 10길 153-4)의 철로까지 흘러간다. 그는 오랜만에 만나는 예전 친구들과의 야유회에서 술이 취해 난동을 부리고, 결국 철길 위에까지 기어 올라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나 다시 돌아갈래!”
학살의 기억을 내면화시켜 그 심연의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나온 사람들의 새 역사는 어쩔 수 없이 진화하고 진보한다. 돌아가지 못한다. 한국사회가 어쩌면 여기까지 온 것은 ‘박하사탕’이라는 걸출한 영화적 연대기를 같이 보고 공유했기 때문일 수 있다. ‘박하사탕’으로 한국의 현대사는 새로운 분기점을 통과하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택시 운전사’는 몇몇 빼어난 감동의 장면들을 선보인다. 하워드 혹스 감독의 얘기대로 좋은 영화란 좋은 장면 세 개쯤 있는 것을 말한다면 ‘택시 운전사’는 세 개가 훨씬 넘기에 충분히 좋은 영화다. 예컨대 택시 기사 김만섭이 힌츠페터를 버리고 혼자서 광주를 벗어나 순천의 국밥집에 들러 밥을 먹는 장면 같은 것이다. 그가 묵묵히 숨죽여 밥을 입에 떠 넣고 있을 때 옆에서 밥집 여주인과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광주에서 폭도들이 사람을 죽인대.” 그러자 김만섭은 입에 밥알을 넣은 채 중얼거린다. “그게 아닌데. 폭도들이 그러는 게 아닌데.” 김만섭의 중얼중얼은 차츰 감정의 에스컬레이터를 탄다.
양심과 행동 되돌린 역사 있어
오래된 얘기 같지만 캄보디아의 170만 학살극 ‘킬링 필드’는 불과 50년이 안된 얘기다. 나의 아버지, 어머니가 겪었던 얘기이다. 당연히 그 상처는 아직 아물지 못했다. 킬링 필드에 대한 얘기는 1985년 롤랑 조페 감독(영화 ‘미션’ ‘시티 오브 조이’의 감독)이 만든 ‘킬링 필드’가 있다. 샘 워터스톤이 뉴욕타임즈 특파원인 시드니 샌버그 기자로 나온다. 그는 자신의 통역을 맡았던 캄보디아인 디스 프랜(행 응고르)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쓴다. 인간주의는 매우 훌륭했지만 아쉽게도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 영화였다.
양민들을 학살했던 크메르 루즈의 폴 포트는 1979년 실각했지만 1997년까지 살았다. 학살자들은 대개 오래 산다. 칠레의 피노체트도 그랬다. 피노체트의 잔혹사는 1976년 만들어진 헬비오 소토 감독의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에서 낱낱이 그려진다.
킬링 필드의 비극은 아직 완벽하게 정리되지 못했다. 거기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여인이 프랑스까지 넘어가 아이를 키웠다. 그 아이가 드니 도라는 캄보디아계 프랑스 감독이고, 그는 2018년 애니메이션 ‘1975 킬링 필드 : 푸난’을 만들었다. 캄보디아 학살의 역사도 서서히 공유와 연대의 역사로 바뀌어 가고 있는 중이라는 얘기다. 그게 중요하다. 정치·군사적 외교는 역사적 성찰과 연대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그런 법이다. 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