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가 줄고, 젊은이는 더 많이 감소하다 보니 일할 수 있는 노동력 역시 심각할 정도로 줄었다. 이 때문에 농어업이나 제조업 등 생산 현장에서는 이미 외국인 없이는 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좁게는 노동력 부족 현상 해결, 넓게는 한국 경제의 지속 성장 및 한국 사회의 지속 가능성 유지를 위해 이민 확대가 불가피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는 이유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 이민청 하나 만들지 못한 데다가 외국인 노동력 유입도 20년 전 만들어진 고용허가제에 기반을 두고 있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이대로는 조만간 도래할 ‘이민 유치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다.
실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경제가 일정 궤도에 오른 국가들은 예외 없이 저출산, 고령화의 문제에 직면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인 이민 유치 정책을 펴고 있다. 중앙일보는 예견된 ‘이민 시대’를 제대로 대비하자는 차원에서 우리의 현주소를 짚어보고 주요 이민 유치 경쟁국과 인력 송출국, 이민 유치에 성공한 선진국들의 현장을 두루 살펴봤다.
먼저 한국과 가장 유사한 인구 구조 및 국민감정을 가진 데다가 장래에 한국의 이민 유치 경쟁국이 될 수 있는 일본의 상황과 노력을 현장 취재를 통해 보도한다. 외국인에 대한 폐쇄성으로 유명했던 일본은 “제도에 있어서는 한국을 앞질렀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혁신적인 변화에 나서고 있었다.
도쿄 한복판 요양시설 외국인 채용…日 ‘쇄국’ 빗장 풀었다
(끄덕끄덕)
“요캇타(다행이네요)”
지난달 12일 일본 도쿄 신주쿠(新宿)구의 한 개호(요양)시설 ‘너싱빌라 르네사 요츠야’(너싱빌라). 한 20대 여성이 70대 할머니에게 “점심이 맛있었느냐”고 물었다. 틀니를 빼고 있던 할머니는 휠체어에 앉은 채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에는 그날 오전 요양시설 취미활동으로 만든 카자구루마(風車, 바람개비)가 들려 있었다. 젊은 여성은 그걸 보고 “타노시캇타?(즐거웠나요?)”라며 연신 대화를 이어갔다. 할머니에게 일본어로 따뜻한 말을 건넨 이는 일본인이 아니었다. 그는 필리핀 노동자였다.
악셀 네이딘(21·필리핀)은 지난 2월 일본의 요양시설에 취업했다. 현재 이곳 직원 25명 가운데 5명은 외국인이다. 최근 몇 년간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으로 인해 외국인 채용을 못 하다가 2월부터 4명(미얀마 2명, 필리핀 2명)을 뽑았다. 이나 요시마사(伊奈義将) 너싱빌라 사업본부장은 “시설이 도쿄에 있는데도 일본인은 구하기 힘든 실정”이라며 “외국인이라도 이곳에서 일 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지경인데, 환자나 보호자 만족도까지 아주 높아 더 채용하고 싶다”고 말했다.
日 초대 이민청장 “선택 받는 나라 만들겠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외국인에 대한 폐쇄성으로 유명했던 일본도 달라졌다. 외국 인력을 받아들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이민 정책을 바꾸고 인력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이민 정책 변화가 주목되는 건 일본이 고령 인구 증가 속도와 산업 발전 과정, 정부 정책 등 측면에서 한국과 가장 유사한 나라라서다. 중앙일보는 지난달 ‘글로벌 이민시대’의 참고 사례가 될 수도, 경쟁 대상이 될 수도 있는 일본의 이민 정책을 살펴보기 위해 일본을 찾아 초대 이민청장(출입국재류관리청장), 국회의원, 교수 등을 만났다. 일본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이 사는 아파트 단지, 적극적으로 외국인 노동자를 채용하고 있는 요양 시설 등 의미 있는 현장도 방문했다.
지난달 10일 만난 일본의 초대 출입국재류관리청장 사사키 쇼코(佐々木聖子)는 “지금 일본은 (외국인에게) ‘선택받을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각오”라고 강조했다. 출입국재류관리청은 일본의 이민청 격인 기관이다. 일본은 지난 2019년 이 기관을 신설하면서 아직 이민청이 없는 한국을 한발 앞서 나갔다.
폐쇄국가 일본, 30년 만에 변했다…기능실습제 폐지 가닥
지난해 기준 일본의 외국인 수는 307만5213명으로 사상 처음 300만 명을 넘었다. 유학생과 영주권자를 제외한 150만명의 외국인 가운데 약 20%(32만5000명)가 기능실습제를 통해 들어왔다.
그러나 일본 내에서는 이에 대해 “시대에 뒤떨어진 제도”라는 비판이 제기돼왔다. 실제 이 제도는 ‘국제 공헌’이라는 다소 생뚱맞은 목적을 갖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를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잘 가르친 뒤 돌려 보내 국제사회에 공헌하기 위한 제도라는 게 일본 정부의 주장이었다. 이 제도를 통해 취업한 외국인은 몇 번의 체류 연장에 성공한다 해도 최대 5년까지만 일본에 머물 수 있다. 신분도 ‘노동자’가 아니라 ‘실습생’에 불과하다. 일본 정부가 이 제도를 도입하면서 외국인에게 반감이 큰 국민 정서의 눈치를 봤기 때문에 이런 ‘반쪽 제도’가 만들어지고 지금까지 존재해왔다.
이 때문에 일본 내에서도 “실제 목적과 괴리된 위선적 제도”란 비판이 따라다녔다. 기껏 외국인을 교육해 숙련 인재로 키워도 지속해서 고용을 이어갈 수 없다는 한계도 명확했다. 외국인을 ‘동료’로 인정하지 않으니 장시간 노동, 낮은 급여 등 인권 침해 논란도 심했다. 미국 국무부가 2021년 발표한 인신매매 보고서도 “외국을 거점으로 하는 인신 매매업자와 국내 업자가 외국인 노동자를 착취하기 위해 계속 이 제도를 악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日, 외국인 노동자 이직 허용…한국은 원칙적 불허
1호는 ‘상당한 정도의 지식과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2호는 ‘작업반장을 맡을 수 있을 정도의 뛰어난 기술력을 가진 인재’가 자격 요건이다. 1호 비자의 가장 큰 특징은 기능실습제와 달리 체류 중에 업종 내 이직이 가능해 외국인이 보다 다양한 현장에서 일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도 아직 원칙적으로 불허하고 있는 이직을 허용했다는 건 상당한 파격이다. 특히 2호 비자를 받으면 기간 제한 없이 일본에 체류할 수 있고, 가족도 동반할 수 있다. 도입 첫 해 1621명이던 특정기능 1호 자격자는 지난해 13만915명으로 급증하면서 일본 각지의 부족한 일손을 채우고 있다.
“일본인은 이틀 만에 관뒀다”…현실적인 외국인 정책 필요
1호 비자 발급 가능 업종으로 지정된 현장의 만족도도 높다. 이나 본부장은 “일본인을 채용하려면 관련 경력이 없는 60대 이상이라도 소개비 50만 엔(약 500만 원)을 내야 한다”며 “그마저도 일본인은 2~3일 일하고 관두거나, 채용 면접 당일 안 오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어 “채용한 외국인이 가능한 한 오래 일하길 바란다”며 “우리가 먼저 그들 나라 관련 안내 책자를 자체적으로 만들어 일본인 직원에게 나눠주고 가까운 마트의 쇼핑 정보를 공유하는 등 적응을 도울 수 있게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베트남 등 동남아 7개국에 지부를 두고 있는 일본 인력송출업체 ‘오노데라 유저 런’(OUR)의 시바 히토미(柴瞳) 홍보부 차장은 “인력을 보내기 전에 가족이 어떤 사람인지까지 철저히 조사한다”며 “업종에 맞는 교육을 6개월씩 진행하고 철저히 뽑다 보니 불법 체류로 빠지는 부작용도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전문가 “일본 변화 충격적”…이민청도 日이 먼저
이민에 소극적이던 일본이 급격하게 변화한 데는 역시 자국의 심각한 고령화로 인력 부족이 한계치에 달했다는 사실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하지만 경쟁국인 한국에 밀렸다는 위기 의식도 원인으로 작용했다. 한국과 일본은 이민 정책과 관련해 서로 제도를 참고하고 개선하면서 앞서거니 뒷서거니 했다. 한국이 1990년대 산업연수생 제도를 만들 때 일본의 기능실습제에 영향을 받았고, 일본은 특정기능 제도를 만들면서 한국의 고용허가제를 참고했다.
2004년 한국이 고용허가제를 만들 때만 해도 한국이 앞서나가는 듯 보였다. 경제성장으로 인한 임금 상승 속도도 한국이 일본을 앞섰다. 한일 이민 정책을 연구한 선원석 오사카경제법과대학 아시아태평양연구소 연구원은 “일본의 임금이 30년 가까이 정체한 반면 한국은 계속 오르면서 전반적인 이민 여건에서도 일본이 크게 뒤처졌다”며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이번 외국인 정책의 변화에도 한국에 밀렸다는 내부 인식이 작용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타카야 사치(高谷幸) 도쿄대 사회학 교수는 “일본의 정책과 정치 관계자는 한국에 관심이 많고 한국을 경쟁자로 여기고 있다”며 “한국보다 매력적인 제도를 만들어야 외국인 노동자가 일본으로 온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일본 내에서도 급격한 변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작지 않다. 특히 외국인 노동자의 이직 허용은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다. 이직이 가능해지면 상대적으로 임금이 높은 도시로 지방 인력을 빼앗기거나 불법 체류가 증가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선원석 연구원은 “일본도 이직 허용과 관련해 지역 내 이동을 규제하는 등 여러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며 “이런 우려들이 있지만 인력 부족이라는 현실이 너무 심각하기 때문에 큰 모험을 하는 셈”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한국은 아직 첫발조차 내딛지 못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지난해 5월 취임사에서 “이민청 설립 검토를 포함해 이민정책을 수준 높게 추진해 나갈 체제를 갖춰나가자”고 밝혔지만 두 달여 뒤 발표한 ‘윤석열 정부 110대 국정과제’에서 이민청 얘기는 쏙 빠졌다. 이후 별 다른 진전이 없는 상태다.
이민청 신설은 김대중 정부 때부터 필요성이 제기됐던 사안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에도 법무부가 “출입국관리국을 외청화해 2010년까지 미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이 운영 중인 이민청을 신설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국내 여론 반발에 밀려 무산됐다.
선원석 연구원은 “2007년 재한 외국인처우 기본법을 공포할 때 출입국과 통합 정책을 총괄할 수 있는 이민청 설립도 같이 했어야 했다”며 "당시는 실험 단계여서 미뤘다고 해도 아직도 설립하지 않은 건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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