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 백지 신탁제도(Blind Trust) 제도는 미국에서 처음 도입된 제도로 태생부터 거대 자본가의 공직 진출과 관련이 깊다.
‘워터게이트 사건’ 발생 후 1974년에 대통령이 된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넬슨 록펠러를 부통령으로 지목했다. 록펠러 부통령은 미국 석유 재벌인 록펠러 가문 출신으로 당시 평가액으로 1억1600만 달러에 달하는 주식을 취임 전 백지 신탁했다. 당시는 이를 의무화하는 제도가 없었는데도 그가 이런 선택을 하자, 이후부터 고위공직자가 직무 관련성이 있는 주식·채권을 보유할 경우 신탁회사에 맡기는 게 관행으로 자리 잡게 됐다. 또 고위공직자의 이해 상충 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우려가 커지자 1978년 ‘정부 윤리법’이 제정되면서 백지신탁이 법제화됐고 이후 ‘연방규정’을 통해 상세조건이 보완됐다.
미국 백지 신탁제도는 신탁자의 입김을 배제한 채 수탁자가 자산을 ‘관리·운용’한다는 데 방점이 있다. 보유 주식을 처분하지 않고 거대 포트폴리오에 편입시켜 관리하는 것도 가능한 구조다. 다만 그 운용은 까다롭다. 미국은 주식·채권·펀드 등 재산 중 1000달러(약 130만원) 초과액은 백지 신탁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미 정부윤리국(OGE)은 2019년 가상화폐도 백지 신탁 대상에 포함했다. 또 백지 신탁이 결정될 경우, 공직자-수탁자 간 정보를 완전히 차단한다.
반면 한국의 경우 주식백지 신탁심사위원회가 직무 관련성을 인정할 경우, 해당 주식을 사실상 매각하도록 강제한다는 게 가장 큰 차이다. 한국에서 수탁기관은 백지 신탁계약을 맺은 뒤 60일 이내 신탁된 주식을 처분하게 돼 있어, ‘백지 매각제’란 말도 나온다.
물론 미국에서도 공직자가 보유 주식을 반드시 매각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정부윤리국이 고도의 직무 관련성이 있다고 판단해 처분을 통보할 경우인데, 개인의 재산권을 중시하는 미국에서 이런 판단은 제한적이다.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은 블룸버그 통신사 경영권을 포기하지 않고 공직을 지켰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도 처분 통보를 받지 않았다.
미국은 직무 관련성이 있는 주식을 매각할 경우 시세차익에 대한 소득세도 면제해준다. 골드만삭스 CEO 출신인 헨리 폴슨 재무부 장관이 2006년 취임할 때 6억 달러 상당의 골드만삭스 지분을 전액 처분하며 5000만 달러의 소득세를 면제받은 것이 대표적 사례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직무 관련성에 대한 규정이 모호한데다, 국민 정서상 이를 미국보다 훨씬 폭넓게 적용한다. 임지원 전 금융통화위원의 경우, 2018년 5월 취임 당시 미국계 투자은행인 JP모건 주식 약 8억원 어치를 보유한 것이 논란이 됐다. 한국 금리로 미국 주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해상충’이란 압박 속에 미국 주식을 모두 처분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