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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스크 와도 장관 못한다"…18년째 3000만원, 낡은 백지신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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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꿈과 도전의 뉴스페이스 시대, 우주경제 개척자와의 대화'에서 발언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우주항공청 설립을 핵심과제로 삼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꿈과 도전의 뉴스페이스 시대, 우주경제 개척자와의 대화'에서 발언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우주항공청 설립을 핵심과제로 삼고 있다. 연합뉴스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도입된 백지신탁제도는 지난 18년 동안 고위공직자의 이해상충 문제를 막는 대표적 장치였지만 낡은 규정 때문에 역효과가 적지 않다.

대표적인 사례가 윤석열 대통령이 추진하는 우주항공청 설립을 두고 벌어진 ‘백지신탁 예외’ 논란이다. 지난 15일 서울 강남구 과학기술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우주항공청 설치 및 운영에 관한 특별법’ 제정 공청회에서는 “이해충돌 직무 관여 금지를 전제로 백지신탁 적용의 예외를 둔다”는 조항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공직자가 항공 주식을 보유하는 것이 이해상충 아니냐는 논리였다.

그러자 정부 측은 “100% 주식 보유를 허용하는 게 아니라 신고 의무 등을 둬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간 전문가를 영입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보유 주식이 무조건적인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취지였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이런 상황은 정권마다 반복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 말인 2021년 5월 인사청문회 정국에서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우리나라에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같은 분이 계신다고 해도 그분들을 장관으로 쓸 수 없다”며 “주식을 다 팔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①처분 위주의 제도…신산업 분야에선 인재 발탁 장애물

백지신탁은 고위공직자 본인과 직계 존·비속이 총 3000만원을 초과하는 주식을 보유할 경우, 직무관련성이 있으면 임명 후 2개월 안에 이를 백지신탁하거나 매각하도록 한 제도다. 이의가 있으면 인사혁신처 주식백지신탁심사위원회(이하 심사위)의 심사를 받아 예외를 인정받으면 된다. 하지만 예외 인정을 못 받으면 백지신탁·매각 중 하나를 택하는 구조다.

지영미 질병관리청장이 22일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질병관리청에서 코로나 19 대응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스1

지영미 질병관리청장이 22일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질병관리청에서 코로나 19 대응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스1

24일 공개된 3월 수시 공직자 재산공개에서 지영미 질병관리청장 본인과 배우자의 보유주식은 ‘0주’였다. 지 청장 배우자는 삼성바이오로직스(20주), SK바이오사이언스(30주), 에이비엘바이오(100주) 등 바이오 주식을 갖고 있었지만, 지난해 12월 지 청장이 임명되자 직무관련성 심사도 신청하지 않고 모두 팔았다. 전임자인 백경란 전 청장이 취임 이후에도 “심사 중”이라는 이유로 바이오 주식 수천만원어치를 보유해 논란을 일으킨 것을 의식했다는 말이 나온다. 윤태범 방송통신대 교수(행정학)는 “보유 주식이 직무와 관련성이 있는지는 당사자가 가장 잘 안다”며 “직무관련성 심사를 거치기 전에 자발적으로 처분하는 것이 이해상충을 피하는 방법일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신산업 관련 민간 전문가에게서는 이런 사례가 나오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이들이 창업 등의 이유로 관련 업체의 주요 주주인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백지신탁을 한다고 해도 “수탁 금융회사는 60일 이내에 수탁받은 주식을 처분한다”(공직자윤리법 14조의4)는 규정 때문에 주요 주주 자리를 잃을 가능성이 크다. 백지신탁을 하면 수탁 금융회사가 장내 매도나 블록딜(시간 외 대량매매) 방식으로 이를 매각하는 구조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3년 코스닥 상장기업인 주성엔지니어링의 황철주 대표가 중소기업청장에 내정됐다가 사흘 만에 “회사와 주주를 버리고 청장을 택할 수 없다”며 사퇴한 것도 공직에 오르기 위해서는 기업 자체를 포기해야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익명을 원한 금융부처 고위인사는 “백지신탁을 맡겨도 수탁사가 60일 이내에 매각을 해야하기 때문에 공직자 입장에서는 ‘백지매각제도’에 가깝다”며 “재산권에 대한 침해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일부 고위공직자는 재산권 침해를 이유로 백지신탁 결정에 불복하기도 한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해 본인과 배우자가 보유한 8억원대 바이오 주식을 처분하라는 심사위 결정에 “고위공직자가 된다고 해서 재산상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국민권익위원회에 행정심판을 청구해 기각이 되어서야 전량 매각했다. 차관급인 유병호 감사원 사무총장과 박성근 국무총리 비서실장은 배우자가 소유한 기업 주식을 백지신탁하라는 심사위 판단에 불복해 각각 행정소송과 행정심판을 제기한 상태다.

②18년 된 ‘3000만원’ 하한선…‘해외주식 미포함’도 문제 

2005년 법 제정 당시 정한 하한선 ‘3000만원 초과’ 기준이 18년째 유지되는 것도 현실성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는 한국에서 1인당 주식투자액 7245만원(예탁결제원·2020년 12월 기준)의 절반에 못 미친다. 2005년 당시 코스피 지수(연말 종가)는 1379.37이었지만 지난해 연말 종가는 2236.40으로 2배 가까이 증가한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2005년 당시에도 은행연합회 등 민간에서는 하한선을 1억원으로 잡았었다.

인사혁신처는 2021년 한국인사행정학회에 의뢰한 『이해충돌방지를 위한 백지신탁제도 운영 개선 방안』 연구용역 보고서를 통해 “각종 자산가격이 급등한 현 시점에는 하한선을 5000만원으로 올리는 것이 적합하다”고 지적했다.

2013년 3월 황철주 중소기업청장 후보자가 경기 광주 오포읍 주성엔지니어링 본사에서 후보자 사퇴 의사를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2013년 3월 황철주 중소기업청장 후보자가 경기 광주 오포읍 주성엔지니어링 본사에서 후보자 사퇴 의사를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반면에 공직자 윤리성 강화를 위해 보완해야 할 점도 여럿 지적된다. 대표적 사례가 2005년 법 제정 당시부터 이어져 온 ‘해외주식 예외’ 규정이다. 이에따라 애플, 알리바바, 아마존 등의 해외주식을 3000만원 넘게 보유해도 백지신탁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고위공직자가 해외기업과 영향을 주고받는 경우가 있어 제도보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2020년 김종갑 당시 한국전력 사장은 글로벌기업 지멘스의 주식 7339주(약 11억원)를 보유했는데 김 사장 취임 후 지멘스는 한전에서 3건(약 60억원)의 일감을 수주해 논란을 빚었다.

③늘어지는 적격심사 탓에 이해상충 논란 야기

일각에서는 백지신탁심사위원회의 ‘느림보’ 심사가 이해상충 문제를 더 키운다는 지적도 있다. 현행 공직자윤리법은 “심사위는 1개월 이내에 직무관련성 여부를 청구인에게 통지하고, 필요하면 1개월 더 연장한다”고 규정했지만 실제론 3~4개월까지 심사가 늘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회원들이 지난 1월 26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실련에서 윤석열 정부의 장·차관 주식백지신탁 의무 이행 실태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회원들이 지난 1월 26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실련에서 윤석열 정부의 장·차관 주식백지신탁 의무 이행 실태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백지신탁을 했던 국회의원실의 한 관계자는 “심사 기간이 길어지다보면 고위공직자가 취임한 뒤 몇달 동안 관련 주식을 보유하기 돼 이해상충 문제가 저절로 생기게 된다”고 지적했다.

차진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백지신탁 제도는 인재발탁 측면에서는 아쉬운 부분이 있다”며 “다만 국민정서상 필요하다는 여론이 많기 때문에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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