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이론으로 본 세상
잘 알려져 있듯이 미국 금융위기의 원인은 높은 이익을 노린 미국의 금융업체들이 서브프라임 모기지라는 위험한 금융 상품을 만들었다가 주택 가격의 거품이 꺼지면서 시작된 것이다. 은행을 비롯한 미국의 금융업체는 눈앞의 이익에 판단력이 흐려져서 주택을 구매하려는 사람들에게 정말 빚을 갚을 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엄격한 심사를 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돈을 빌려줬다. 이런 금융업체의 무책임한 행동을 허용하면 어떤 경제적 재난이 올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사건인 동시에 이런 민간 업체들에 모든 판단을 맡기면 안 되고 정부가 나서서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는 교훈을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안겨줬다.
규제 기관과 기업이 같은 편 되는 현상
그런데 피시위크의 고생은 오히려 그때부터 시작됐다. 영국의 은행 감독 기관들이 피시위크의 은행 운영 방법이 불법이라고 경고를 하고 영업을 정지시켰다. 그래서 피시위크가 국회의원들도 찾아가고 방송에도 등장해서 영국 금융 감독 기관들의 답답하기 그지없는 규제를 비판한 끝에 결국 우리로 치면 ‘번리 마을금고’와 같은 작은 은행을 세우게 된다. 결론적으로 영국 정부의 금융 감독기관은 다른 대형 은행들보다 더 높은 금리를 주고 예금을 받아서 거대 은행들이 대출을 거절한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에게 대출해 이익을 창출한 피시위크의 은행을 칭찬해 주지는 못할망정 각종 규제를 통해서 영업을 중단시키려 했던 셈이다.
재밌는 부분은 방송 중간에 피시위크가 미국을 방문해 누구든지 비교적 자유롭게 은행을 개설할 수 있는 금융시스템을 보고 부러워하는 장면이 방송에 나온다는 것이다. 미국은 금융권에 대한 감독이 소홀해서 2008년 금융위기가 발생했고 그에 비해서 영국은 금융권에 대한 감독이 철저해서 미국보다는 수월하게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영국의 기업인들은 영국 정부가 지나치게 금융산업을 규제하고 간여해서 비즈니스를 하기 힘들다고 느낀다는 점이 의외였다. 실제로 영국의 거대 은행들은 모두 100년을 훨씬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이를 다르게 생각하면 지난 100년간 새로 탄생한 은행이 전혀 없다는 의미이다. 어느덧 관성에 젖은 ‘그들만의 리그’가 된 것이 놀랍지도 않은 것이다.
경제학에는 ‘규제 포획(regulation capture)’이라는 용어가 존재한다. 1982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조지 스티글러(George Stigler) 교수가 1971년에 발표한 ‘경제적 규제에 관한 이론(The Theory of Economic Regulation)’이라는 논문에서 이 규제 포획의 의미가 잘 드러나 있다. 원래 정부가 어떤 기업을 규제한다고 하면 그 기업이 국가 경제에 해를 입히는 일이 없도록 잘 감시하고 지도하는 것이 목적이다. 당연히 기업의 입장에서는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방해하는 정부의 이런 규제가 달갑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규제하는 정부와 규제당하는 기업의 관계가 오랜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정부와 기업이 같은 편이 되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 규제 포획이다. 즉 규제하던 정부 기관이 규제를 당하는 기업에 포획을 당한다는 의미이다.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정부도 결국 사람인 공무원이 운영하는 기관인데 규제하는 기업과 관계가 오래되면 서로의 사정을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극단적인 상황이라면 기업에서 공무원과 정부를 상대로 로비해 기업의 잘못을 눈감아 주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규제 포획인 것이다. 물론 규제 포획이라는 용어가 처음 나온 50년 전과는 달리 현대 사회는 모든 금전 거래가 투명하게 이루어지고 있어서 노골적인 금전을 통한 로비는 존재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기업을 규제하는 공무원과 정부 기관의 입장에서는 어느새 규제당하는 기업의 편에서 옹호해줄 이유가 존재한다.
규제 심한 영국, 미국보다 성장 더뎌
실제로 조지 스티글러 교수가 조사를 해보니 규제를 시작한 기업이나 산업에서 새로운 경쟁자들이 진입이 현저하게 줄어들거나 아예 중지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정부 기관이 어떤 은행을 규제하고 있는데 그 은행의 새로운 경쟁자가 들어와서 기존의 은행보다 훨씬 나은 성과를 올린다면 오랜 시간 규제를 하고 있던 공무원과 정부 기관의 입장에서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데이브의 은행이 성공하자 아마 영국의 금융 당국은 100년이 넘도록 정부의 감시를 받은 대형 은행이 지방 소도시의 작은 신설 은행보다 못하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데이브의 은행 영업을 중지시키려 했을 수 있다.
최근 한국의 대형 은행들이 자신들이 안전한 지위를 배경으로 안일한 경영을 한다고 여러 곳에서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영국과 같이 100년이 넘는 세월은 아니지만 한국의 은행들도 오랫동안 제대로 경쟁 은행의 신규 진입을 경험하지 않았다. 그런 측면에서는 새로운 은행의 진입을 권장하여 경쟁을 통해서 은행의 서비스를 높이자는 정책은 의미가 있다. 정부에서 공공성을 강조하고 나선 통신산업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경쟁의 본질은 단순히 기업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경쟁에서 패배해 도태되는 기업이 있어야 의미가 있다. 아무도 도태되지 않고 패배하지 않는다면 긴장하여 열심히 노력할 기업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 국민과 정치권이 규제 포획에서 벗어나서 은행의 경쟁을 촉진하기를 원한다면 아주 가끔 내가 예금한 은행이 경쟁에서 패배해 도산할 수도 있다는 위험을 어느 정도 감수할 각오는 필요하다.
2008년 금융위기에서 큰 좌절을 겪었지만 결국 미국의 경제는 안정된 은행들이 이끄는 영국의 경제보다 항상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가끔 위기를 겪더라도 경쟁을 촉진해 성장을 목적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성장을 희생하고 안정된 규제 경제로 갈 것인지를 온 국민이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