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 기수냐 제2 슈뢰더냐…마크롱 연금개혁 세계 이목 집중

중앙일보

입력 2023.03.04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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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 제도 손보는 프랑스 대통령 

지난달 16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대학생들이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연금 개혁 반대 시위에 참석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해 5월 두 번째 5년 임기를 시작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연금 개혁을 놓고 좌파 정당 및 노동조합과 정치적 운명을 건 한판 승부에 돌입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연금 제도를 손보지 않으면 머지않아 적자의 늪에 빠질 것”이라며 정면 돌파를 선언했다.
 
마크롱의 연금 개혁안은 2030년부터 정년을 현행 62세에서 64세로 2년 늦추고 연금을 100% 수령하는 데 필요한 납입 기간도 2027년부터 42년에서 43년으로 늘리는 게 골자다. 15~19세 때 일을 시작해 조기 연금 수령이 가능했던 ‘장기 경력 노동자’의 정년도 60~62세로 지금보다 2년 늦췄다. 이 법안은 지난 1월 국무회의와 의회 상임위를 거친 뒤 지난달 18일 하원 본회의 토론 절차를 마쳤으며 지난 2일 상원 심의에 착수했다. 2주간의 상원 심의가 끝나면 표결에 들어가게 된다.
 
주목할 부분은 마크롱이 정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도 자신의 개혁 상징인 연금 개혁을 위해 전력 질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좌파와 노조도 “연금은 나의 권리” “마크롱은 세기의 파괴자” 등의 구호를 내세우며 총력으로 맞서고 있다. 정치인 중에는 지난해 4월 프랑스 대선 때 결선투표에 진출했던 극우 국민연합(RN)의 마린 르펜과 1차 투표에서 3위에 올랐던 극좌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LFI)’의 장 뤽 멜랑숑이 반대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두 정당 모두 정년과 연금에 크게 영향을 받는 노동자층을 주된 지지 기반으로 삼고 있다.
 
좌파 정당과 노조는 지난 1월 19일 첫 대규모 시위에 나선 이후 다섯 차례에 걸쳐 연금 개혁 반대 시위를 벌여왔다. 1차 시위에 노조 추산 200만 명, 정부 추산 162만 명이 모인 데 이어 2차 시위 때는 280만 명(정부 추산 112만 명)이 참여했다. 좌파·노조 측은 오는 7일로 예정된 6차 대규모 시위를 통해 다시 한번 세를 과시할 예정이다.


이처럼 강력한 반발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마크롱이 연금 개혁 법안을 밀어붙이는 데 대해 프랑스 정치권에서는 “마크롱의 중대한 정치적 도전이자 모험”이란 평가가 나오는 가운데 과연 어떤 결론으로 이어지게 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당장 의회를 통과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마크롱이 이끄는 중도개혁 정당인 ‘르네상스(RE)’는 577석을 뽑는 지난해 6월 총선에서 170석을 얻는 데 그쳤다. 총선에서 RE와 손잡고 ‘앙상블’이란 선거 연합을 구성했던 민주운동(DEM)과 지평선(HOR) 의석을 합해도 250석으로 과반에 39석이 부족하다.
 

마크롱

야당은 극좌에서 극우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다. 극우 RN이 88석으로 약진하면서 단일 정당으론 제1 야당으로 자리 잡았다. 여기에 극좌 LFI와 중도좌파 사회당(SOC), 녹색당(ECO), 공산당(GDR) 등으로 이뤄진 좌파 연합 ‘뉘프(NUPES)’가 최대 야당 세력을 이루고 있고 중도우파인 공화당(LR)은 61석을 차지하고 있다. 이 중 집권 연합 내 3개 정당과 공화당이 마크롱의 연금 개혁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꼽힌다. 공화당의 전신인 대중운동연합(UMP) 소속이었던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은 좌파와 노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010년 10월 정년을 60세에서 62세로 늦추는 연금 개혁법에 서명한 바 있다.
 
눈여겨볼 점은 2012년 집권한 좌파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 전 대통령이 정년을 60세로 되돌린 걸 마크롱이 다시 연장하려 한다는 사실이다. 마크롱은 올랑드 정권에서 2년간 경제산업디지털부 장관을 지내다 좌우 이념 정치에 반발해 사임한 뒤 중도 세력을 결집해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런 측면에서 연금 개혁은 프랑스 경제 체질을 좌우 이념 대신 실용적 접근을 통해 바꿔보겠다는 마크롱식 개혁 정치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마크롱은 첫 임기 때인 2019년에도 연금 개혁을 시도했지만 그해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대규모 반대 시위와 파업이 잇따르자 일단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난해 4월 재선되자 곧바로 재추진에 나섰고 이제 표결을 눈앞에 두고 있다. 현재 의회 구조를 볼 때 비록 마크롱이 이끄는 집권 연합이 과반에 미치지 못하지만 우파인 공화당과 손잡을 경우 연금 개혁안이 통과될 가능성이 커질 것이란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하지만 원래 좌파 사회당 정권의 각료 출신으로 중도·실용을 강조해 온 마크롱 입장에선 우파와 전략적 제휴에 나설 경우 정체성 논란이 불거지면서 정치적으로 타격을 입을 우려가 있다는 게 부담이다. 프랑스 헌법상 의회 표결을 건너뛰고 대통령이 직접 입법을 발표할 수도 있지만 “의회도 설득하지 못한 개혁”이란 비난에 직면할 공산이 크다. 어떤 선택을 하든 정치적 부담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프랑스 좌파와 노동조합은 왜 이토록 강력하게 정년 연장에 반대하는 것일까. 한국에선 정년 연장을 은퇴자나 장년층에 대한 취업 기회의 연장으로 받아들이는 시각이 강한 편이다. 상시 고용 노동자의 평균소득을 기준으로 한 연금의 평균 소득대체율이 31.2%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42.2%보다도 11%포인트가 낮다. 정년 연장과 고용이 최대의 복지인 셈이다.
 
반면 일찍이 연금 제도가 발달한 서구에선 2017년 기준으로 미국 71.3%, 프랑스 60.5%, 일본 57.7%, 영국 52.2%, 독일 50.9% 등 소득대체율이 대체로 높다. 상당수가 정년을 노동에서 벗어나 비교적 넉넉한 은퇴 생활을 시작하는 축복의 시발점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특히 좌파 사회민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1998~2005년 재임) 시절 연금 개혁을 이룬 독일의 소득대체율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슈뢰더는 2002년 독일 경제성장률이 0.2%, 실업률이 10%에 이르자 이듬해 3월 실업급여·사회보장·교육 등의 중장기 개혁 프로그램인 ‘어젠다 2010’을 발표했다. 이는 독일을 유럽에서 가장 내실 있는 나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당장 지갑의 돈이 줄어들게 된 유권자들의 반발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슈뢰더의 사회민주당은 2005년 9월 총선에서 기민·기사당에 패하며 제1당 지위를 상실했다. 이후 사민당은 16년이 지난 2021년 9월 총선에서야 정권을 되찾았다. 인고의 세월이었다. 미래를 위해 스스로 가시밭길을 걸은 셈이다. 이런 이웃 나라 독일의 생생한 사례를 익히 알고 있을 마크롱은 과연 어떤 길을 밟게 될까. 정면 돌파에 성공하며 ‘개혁의 선구자’로 평가받게 될까, 아니면 이미 지지율이 30%대 초반까지 떨어진 상황에서 또다시 현실의 벽에 가로막히며 ‘제2의 슈뢰더’ 신세가 될까. 마크롱과 연금 개혁안의 운명에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tzschaei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