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는 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를 들자면 연금개혁을 빼놓을 수 없다. 독일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가 1889년 처음 도입한 국민연금제도의 개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대 간 갈등과 국민적 저항으로 가장 인기 없고 어려운 과제로 꼽힌다. 연금개혁 추진의 파장으로 정권을 잃었던 독일 슈뢰더의 정부 경험은 차치하고, 현재진행형인 프랑스 마크롱 정부의 진통만 해도 연금개혁의 과정이 얼마나 험난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한국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민연금 지난해 운용손실 80조원
수익률 주요 연기금 중 바닥권
1%P만 올려도 고갈 시점 8년 연장
‘더 벌고 더 받는’ 구조로 전환해야
수익률 주요 연기금 중 바닥권
1%P만 올려도 고갈 시점 8년 연장
‘더 벌고 더 받는’ 구조로 전환해야
이런 와중에 국민연금은 지난해 약 80조원의 막대한 운용 손실을 기록했다. 1999년 기금운용본부 설립 이래 최악의 성적표인 -8% 수익률을 낸 것으로 추정되면서 기금수익 악화에 대한 우려가 증폭되고 있다. 지난 10년간 연평균 수익률도 4.9%에 그쳐 세계 주요 연기금 중 바닥권이다. 가장 높은 9.6%를 기록한 캐나다 연금의 절반 수준이고, 미국 캘리포니아 공무원연금(7.1%)이나 노르웨이 국부펀드(6.8%) 등에 비해서도 훨씬 낮다. 국민연금 적립금은 2055년 소진될 예상인데, 기금수익률을 1%포인트만 올려도 고갈 시점을 8년 정도 늦출 수 있다. 수익성이야말로 연금재정 추계의 결정적 변수란 의미다. 국민연금의 저조한 수익률은 정부와 정치권 입김에 좌우되기 쉬운 비전문가 중심의 지배구조 탓이 크다. 기금운용본부의 지방 이전으로 빚어진 전문인력 이탈도 수익률 악화에 한몫하고 있다.
글로벌 연기금 수익률 순위 중 압도적인 1위로 앞서가는 캐나다 연금(CPP)은 1997년 기금 소진을 늦추기 위해 보험료 현실화와 함께 기금운용 지배구조의 대대적인 혁신을 추진했다. 핵심은 캐나다연금투자위원회(CPPIB)의 출범에 있다. CPPIB 설립을 통한 캐나다 연금개혁의 키워드는 기금투자의 전문성과 독립성 강화, 그리고 위험 대비 수익 극대화였다. 금융투자 전문가 집단으로 거듭난 CPPIB는 세계 굴지의 수익 경쟁력을 가진 연기금으로 지속 성장해 왔고 캐나다의 성공적 경험은 여러 나라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었다.
캐나다의 개혁 사례는 세대 갈등과 국민 저항을 피하면서 기금 고갈을 막거나 늦추는 길이 있음을 일깨워준다. 연기금 운용체계의 거버넌스 혁신을 통한 수익률 제고 방안이 그것이다. 연금개혁의 난제를 풀려면 수익률 개선을 위한 기금운용 체제 개혁으로부터 물꼬를 터야 한다. 오죽하면 국민연금이 투자한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에 칼을 휘두르기 전에, 시민단체와 노조 대표 등 투자 분야 비전문가로 구성된 현 기금운용위원회의 구조 개편을 서두르고 자체 거버넌스부터 먼저 개혁하라는 목소리가 나오겠는가. 전문성 강화가 고수익을 반드시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극적 수익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은 가입자인 국민에 대한 정부와 연금 관리기관의 책무다. 성경 표현대로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려면 말이다. 흔히 쓰는 “더 내고 덜 받자”는 구호를 “더 벌고 더 받자”는 슬로건으로 바꾸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지난해 합계출산율이 0.78로 추락해 세계 꼴찌를 기록했다는 뉴스는 충격적이다. 저출산은 빠른 고령화와 더불어 연금재정에도 직격탄이다. 1년째 이어지는 무역수지 적자로 경제성장률 전망도 주요국 중 유일하게 하향 조정되고 있다. 결국 낮은 출산율, 낮은 경제성장률, 낮은 기금수익률의 삼각파도로 기금 소진 시점은 더 앞당겨질 수 있다. 그런 만큼 지금은 미래 세대를 위한 연금개혁을 서둘러야 할 때인데 정치 환경은 악화일로다. 내년 4월로 다가온 총선 일정으로 개혁 추진동력은 떨어질 소지가 크다.
30년 전 G7 국가 중 최악 수준의 국가부채 비율과 고질적 재정적자로 헤매던 캐나다의 운명을 바꾼 인물은 폴 마틴 전 총리였다. 대폭적인 사회보장제도 혁신과 성공적 연금개혁을 이끌었던 그는 “장기적 개혁 과제가 단기적 정치 셈법에 밀리면 국가 미래는 없다”는 말을 남겼다. 오늘날 우리 정치권에 던지는 메시지로 들린다.
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전 금융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