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폭의 수묵화, 친구들 초상화같은 나무

중앙일보

입력 2023.02.04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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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섬’ 사진작가 마이클 케나

1‘철학자의 나무’ 시리즈, 일본 홋카이도, 2004년. [사진 마이클 케나]

“천년 동안 한곳에 살고 있는 나무는 분명 우리의 위대한 스승이다!” 나무 인문학자 강판권씨의 말이다. 『나무신화』를 번역한 이선씨 또한 “늙을수록 추해지는 사람과 달리 나무는 나이가 들수록 장대하고 아름답다. 옛 글에서 ‘땅에서 나는 것 중에 나무가 가장 볼만하다’라더니, 어찌 보면 나무는 하늘에 대한 땅의 대답이 아닐까”라고 했다.
 
영국인 사진가 마이클 케나(69)의 흑백사진 속 나무들을 보면 바로 이런, 깨달음을 얻은 위대한 스승의 모습이 절로 떠오른다. 세상과 뚝 떨어져 묵언수행 하듯 눈밭에 홀로 선 나무, 벌판을 달려온 바람과 벗하기 위해 허리를 90도로 꺾은 나무, 절벽에서 떨어질 듯 버티면서 기어코 하늘을 향해 자라는 나무 등을 바라볼 때면 어느새 시선은 20×20㎝의 작은 프레임에서 벗어나 대자연을 상상하게 된다.
 

마이클 케나

오는 2월 25일까지 서울 삼청동 공근혜갤러리에서 열리는 사진전 ‘철학자의 나무Ⅱ’에서 케나의 아름다운 나무 사진 50여 점을 직접 감상할 수 있다. 올해는 풍경 사진의 대가 마이클 케나가 사진작가를 시작한지 50주년을 맞는 해다. 그는 지난해 프랑스에서 문화예술공로훈장을 수상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에선 사진집 『나무』가 출간됐고, 그의 오랜 파트너인 서울의 공근혜갤러리에선 나무를 주제로 한 전시가 열린다. 전시 첫날, 5년 만에 한국을 다시 찾은 마이클 케나를 만났다.
 
한국에서 마이클 케나의 이름이 유명해진 계기는 2007년 강원도 삼척시 월천리에 있는 소나무숲을 촬영하면서다. 태풍이 할퀴고 간 모래톱 위에 작은 군락을 이룬 소나무숲의 신비스러운 풍경을 촬영한 케나는 자신의 작품에 ‘솔섬(Pine Tree)’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 사진을 본 관광객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덕분에 당시 액화천연가스 기지 건설을 위해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솔섬은 삼척시 관광명소로 지정되면서 보존이 결정됐다. 이후 ‘솔섬’ 사진은 케나의 대표작 중 하나로 전 세계에 한국의 아름다운 풍경을 알리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산의 나무. 한국 충북 단양, 2011년. [사진 마이클 케나]

케나는 ‘솔섬’ 이외에도 2005년부터 지금까지 10여 차례 넘게 한국을 방문해 강원도 월정사, DMZ, 신안, 담양, 청송 등 여러 지역에서 나무·섬·불상·사찰·아침풍경 등 다양한 주제로 촬영을 진행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는 2005년 처음 방문하고 이후 세 차례나 더 갔다는 DMZ. “거품처럼 끊임없이 동그라미를 그리는 철조망이 계속 이어지는 풍경이 참 흥미로우면서도 씁쓸했다. 언제고 이 철조망의 반대쪽 땅, 북한에서 촬영하고 싶은 소망이 있다.”
 

‘쿠사로 호수 나무’ 시리즈, 일본 홋카이도, 2007년. [사진 마이클 케나]

이번 전시는 2011년 공근혜갤러리가 기획한 ‘철학자의 나무’ 전시 이후 11년 만에 열리는 전시다. 대형 필름 카메라로 촬영하고, 직접 암실에서 실버 젤라틴 프린트까지 하는 그의 흑백사진 중 특히 눈과 안개, 하늘과 땅을 배경으로 촬영하는 나무 사진들은 담백하면서도 묵직해서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시킨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색 중 단 두 가지만 썼을 뿐인데, 이렇게 완벽한 울림을 줄 수 있다니 볼 때마다 놀랍다. 영국 북부 도시의 화력발전소, 유럽에 잔재하는 나치 수용소, 한·중·일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의 사찰과 불상, 가톨릭 성당의 고해성사실 등 케나의 사진 시리즈 테마는 꽤 다양하지만 50주년 기념 테마로 ‘나무’에 집중한 이유기도 하다.
 

‘솔섬’ 시리즈, 한국 강원도 월천, 2007년. [사진 마이클 케나]

“18개월 전 파리의 한 출판사가 ‘나무’를 주제로 사진집을 제안하기 전까지는 의식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아카이브를 정리해보니 나무 사진만 6000점이 넘더라.(웃음) 어린 시절, 형제들과 뛰어놀며 나무 밑에 보물을 숨기거나 축구 골대로 이용했던 기억이 있다. 말하자면 내게 나무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구’같은 존재다. 세계 곳곳에 친구가 있고, 내가 찍는 나무 사진은 내 친구들의 초상화다.”
 
그는 또 “나무는 그 자체로 구조도, 실루엣도 아름답고 신비로운 존재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까지 다 알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놀랍도록 속 깊은 존재”라고 했다.
 
“잘 생각해보면 나무는 하늘을 향해 뻗기 때문에 하늘 세상도 잘 알고, 뿌리를 땅에 두고 있기 때문에 흙 아래 세상도 잘 아는 존재다. 하지만 그것을 한 번도 자랑해 본 적 없다. 언제나 겸손하게 변함없이 한 자리에 머물며 스스로를 조용히 성장시켜 나갈 뿐. 나무의 그 속 깊은 내면세계를 카메라에 담아 보여주고 싶다.”
 
왜 사람을 찍지 않나 물었더니 의외로 “아예 안 찍는 것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다만 사람들은 늘 결과를 보고 자기가 잘 못 나왔다며 불평불만이 많다.(웃음) 하지만 나무는 그런 일이 없다. 어디 도망가지도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