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창의력의 원천 와인, 난청 위로해준 친구 역할도

중앙일보

입력 2023.01.07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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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글와글

라인가우 지방의 명품인 와이너리 요하니스베르크. [사진 위키피디아]

클래식 음악에서 3B라 부르는 바하, 베토벤, 브람스는 모두 독일 출신임에도 맥주보다 와인을 사랑했는데, 베토벤의 와인 사랑은 그중 유별나다. 할아버지는 음악인이면서 동시에 성공한 와인상인이었을 정도로 집안의 피에는 포도주가 흐르고 있었다. 고향 본(라인강)과 그가 성공한 도시 빈(도나우강), 두 곳 모두 로마제국과 게르만 민족이 만나던 접경인 덕분에 일찍부터 와인 문화가 발달했다.
 
헝크러진 머리의 이미지가 강렬하긴 했어도, 베토벤에게는 세 가지 일상생활의 루틴이 있었다. 첫 번째는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손으로 일일이 원두 60알을 세어 끓인 뒤 마시던 커피 습관이다. 베토벤이 음악가로 큰 꿈을 이루기 위해 국제도시 빈에 도착한 건 22살이던 1792년. 당시 빈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과 헝가리 왕국을 호령하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거주하던 수도였다. 그는 이곳에서 무려 79차례나 이사했을 정도로 괴팍스런 습관이 있었지만 숲속 산책만큼은 거르지 않았다. 비너발트(Wiener Wald)라 부르는 숲속 산책을 특히 좋아해서 한때 빈 시내와 교외에 동시에 집을 임대해 살았을 정도였다. 산책은 건강뿐 아니라 심리적 안정감도 주었다. 베토벤 전기를 쓴 에드먼드 모리스는 그의 방랑하던 움직임(movement)이 작곡의 악장(movements)으로 연결됐을 것이라 분석한다.
 
세 번째 루틴은 와인 마시기. 빈에서는 연회나 무도회, 귀족의 저택에서 벌어진 실내 연주회를 막론하고 포도주가 빠지는 법이 없었다. 빈에서 첫 후원자였던 리히노프스키 공작의 저택에서 금요일마다 와인을 곁들인 실내 음악회가 열렸는데, 베토벤은 뛰어난 피아노 연주로 빈의 유력 인사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참석자 가운데는 하이든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는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궁정 악장으로 40년 동안 활약하며 당대 최고의 음악가로서 명성을 누리고 있을 때였다. 하이든은 봉급을 와인으로 받기도 했고, 빈에서 가장 큰 규모의 개인 와인셀러를 갖고 있을 만큼 열렬한 와인 애호가였다. 젊은 베토벤은 하이든에게서 대위법 같은 작곡 기법을 배우게 되지만, 오래지 않아 하이든이 세상을 뜨고 그 명성을 잇게 된다. 명사들과 교류가 늘면서 보르도, 부르고뉴, 샴페인 등 프랑스 와인, 헝가리의 토카이 와인도 접하고, 오케스트라와 연습을 끝낸 뒤 단원들에게 와인 잔을 돌리는 모습도 목격됐다.
 
빈의 교외에는 돈가스의 원조 비너슈니첼을 팔고 악사들의 연주가 흐르는 호이리겐(Heurigen)이라는 전통 선술집들이 있다. 호이리겐은 보졸레누보처럼 그해 생산된 햇 와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베토벤 당시 주민 100명당 한곳의 호이리겐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포도밭 주변 산책을 즐기던 베토벤은 호이리겐에 들려 와인을 마시다가 악상이 떠오르면 휴대한 노트에 황급히 기록하곤 했다고 하니 그에게 와인은 영감의 훌륭한 원천임이 틀림없다. 악보를 적은 노트와 스케치북이 늘어나 이사 때마다 곤욕을 치를 정도로 지독한 메모광이었다.


하겐작 베토벤 흉상. [사진 위키피디아]

평생 고독하게 살아야 했던 베토벤에게 와인은 따뜻한 친구였다. 명성과 정반대로 청력은 나빠지고 이명 증세는 죽음의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 서른한 살의 나이에 비밀리에 쓴 ‘하일리겐슈타트 유서’가 그 고통을 짐작케 하는데 그때조차 유일한 위안이 와인이었다. “(와인을 마시면) 나의 나쁜 청력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야.”
 
1827년 3월 26일 사망하기 직전, 베토벤이 마인츠의 음악 출판사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향 와인에 대한 그의 열정을 읽을 수 있다. “라인란트 포도주 혹은 모젤 백포도주 몇 병만 보내주면 좋겠어요.” 1806년산 뤼데스하이머 베르크 포도주 한 상자가 마침내 도착했다. 독일 라인가우 지방의 포도로 만들고 황금색을 띤 해묵은 와인이었다. 하지만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와 입에 댈 수 없었던 베토벤은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하던가. “안타깝다, 안타까워. 너무 늦었어.”
 
그의 사후 75년쯤 빈에서는 전통과의 단절을 선언하며 스스로 분리파라 부르던 예술 운동이 일어난다. 그 성지인 제체시온(Secession)의 지하 전시장에는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라는 34미터 환상적인 대작이 3개의 벽에 그려져 있다. 베토벤 교향곡 9번 음악을 벽화의 형식으로 시각화한 것으로 위대한 음악가에게 바치는 오마주였다. 왜 베토벤인가? 귀족의 후원 속에 안정적으로 살 수 있었지만,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예술관에 충실하게 살았던 독립과 자유 정신에 대한 존경이었다.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며 오스트리아가 자랑하는 그뤼너 펠트리너 백포도주 혹은 모젤의 리슬링 한잔으로 건배를 외쳐볼까.
 

손관승 인문여행작가 ceonomad@gmail.com MBC 베를린특파원과 iMBC 대표이사 를 지냈으며, 『리더를 위한 하멜 오디세이아』,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 등 여러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