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화의 공간탐구생활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고 싶은 이들을 위해 빈소는 서울 서대문구 대신동 ‘김옥길 기념관’에 조촐하게 차려졌다. 김 교수가 1947년부터 살아온 자택 앞마당에 지은 19평짜리(건축면적 62.64㎡) 작은 건물이었다. “300년 가는 집을 지었다”며 김 교수가 살아생전 아끼던 공간이었다. 그는 자택과 함께 이 건물도 이대에 기증했다.
건축 설계한 김인철 “날 만든 프로젝트”
그 결과 대한민국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작업자들은 똘똘 뭉쳐 예술작품과도 같은 건물을 완성했다. 김인철 대표는 “김옥길 기념관이라는 작은 건물에서 했던 건축적인 실험이 성공한 덕에 이후 나의 건축을 자신 있게 밀고 나갈 수 있었다. 오늘날의 김인철을 있게 한 프로젝트였다”고 소회했다. 당시 건물의 건립과정과 남달랐던 건축 의뢰인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한다.
이윽고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15대 총선을 앞두고 김 교수가 정계 은퇴를 했을 때였다. 그는 새로운 정치를 위해 창립한 ‘태평양시대위원회’의 사무용품비라도 마련하겠다며 집 마당에 찻집을 짓고 싶다고 요청했다. 그리하여 갤러리를 겸한 찻집을 짓기로 의기투합했다. 설계비가 얼마냐는 김 교수의 질문에 건축가는 “그냥 1000만원만 주세요”라고 답했다. 지하가 있는 2층짜리 작은 건물의 설계비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 막연해 던진 말이었다. 김 교수가 즉각 말했다. “알았네. 계좌번호 써 주게.” 이것저것 따지는 게 없는 의뢰인이었다.
다음날 설계비 전액인 1000만원이 입금됐다. 계약금 얼마가 입금될 줄 알았던 건축사무소 직원이 깜짝 놀랐다. 김 대표는 ‘통이 크신 분이구나’라고 생각하며, 설계를 시작했다. 설계안을 설명하기 위해 김 교수를 만난 어느 날의 풍경은 이랬다. 김 교수는 손사래부터 쳤다.
“설명 들어도 몰라. 나한테 설명할 필요 없어. 자네 마음에 드나?”
“네. 여러 안을 만들었는데 제일 마음에 드는 안으로 최종 정리해서 가져왔습니다.”
“자네 마음에 들면 짓게.”
공사비는 3.3㎡당 300만원으로, 총 2억원(연면적 212.69㎡)을 예상한다고 했더니, 김 교수는 역시나 따지지 않고 “알았네”라고 말했다. 한데 지하공사에 들어가면서 문제가 터졌다. 마당 아래가 암반이었다. 주택가라 발파공사를 할 수 없어 일일이 쪼아내야 했다. 돌 깎는데 기존 공사비를 다 쓸 정도였고, 공사는 지지부진했다. 그런데 괴짜 건축주는 자기 앞마당에 펼쳐진 공사현장에 한 번도 들르지 않았다. 아침에 운동 나가면서 휙, 퇴근길에도 휙 지나칠 뿐이었다.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처사에 건축가는 처음에는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다고 소회했다. 그러다 지나가는 운전기사를 붙잡고 물었다. “아니, 궁금하지도 않으세요?”
“교수님이 공사 현장 들어가서 아는 척하면 바로 자른다고 하셨어요. 공사비가 얼마 들든 그건 알아서 하는 거고, 간섭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어요.”
건축가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김 대표는 “나중에 댈 핑곗거리가 아무것도 없었다. 완전히 코 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공사 기간이나 공사비가 부족해서, 건축주가 이상해서라고 댈 핑곗거리가 없었다. 공사가 진행될 당시 외환위기가 터졌다. 다른 공사현장은 다 엎어졌는데도 남아 있는 유일한 현장이었고, 처음에 예상했던 공사비를 훌쩍 넘어섰는데도 공사비는 청구하는 족족 나왔다. 작업자들이 의기투합해 장인의 기술력을 펼치기 시작했다. 김 대표는 “노태우 정권 때 주택 200만 가구 공급을 내세운 이후 빨리 짓는 것만 몰두해 업계에서 장인이 사라졌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라 숨어 있었던 것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김동길 교수 지난달 별세 후 이대에 기증
거푸집이 가장 중요했다. 콘크리트가 굳는 과정에서 터지지 않도록 단단하고 섬세하게 거푸집을 짜야 했다. 마침 한옥 짓던 목수가 이 작업을 위해 현장에 투입됐다. 레미콘 타설도 문제였다. 통상 한 층씩 거푸집을 짜고 콘크리트를 치며 쌓아 올리는데, 레미콘 배합 상태에 따라 층마다 콘크리트의 색이 달라질 게 분명했다. 얼룩덜룩한 건물이 되지 않으려면 콘크리트를 한 번에 쳐야 했다. 고민하고 있는데 목수가 나서서 말했다. “2층 건물 통으로 거푸집을 짜보겠습니다.”
건물은 마치 네모 상자가 겹겹이 이어지는 형태인데, 사이사이 유리를 끼워 넣어 보는 각도에 따라 닫히고 열린 느낌을 준다. 김 대표는 “한국 건축의 특성인 열린 공간을 만들어 작지만 작지 않은 느낌을 받게 했다”며 “좋은 의뢰인을 만난 덕에 그동안 고민했던 한국성, 노출 콘크리트 공법 등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건물이 완공된 모습을 보고, 김 교수는 그냥 찻집이 아니라 ‘김옥길 기념관’으로 이름 짓자고 나섰다. 김옥길 여사(1921~1990)는 김 교수의 누나로 이대 총장, 문교부 장관을 역임했다. 누이를 기념하는 공간으로 상징하고 싶을만큼 건물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 교수는 정말 공사 현장이 궁금하지 않았던 걸까. 훗날 저녁 자리에서 “딱 두 번, 밤에 살짝 들어가 봤다”고 건축가에게 털어놓더란다. 김옥길 기념관은 사람을 한번 쓰면 끝까지 믿고 맡기는 김 교수의 성품 덕에 외환위기마저 극복하고 멋지게 완성됐다. 이대에 기증되어, 앞으로도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그의 뜻을 전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