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기후에 우는 건설노동자들
지난 1일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지구 건설현장. 김지성(48, 경기도 고양시)씨가 흘러내리는 땀을 소매 끝으로 훔쳤다. 동료 정동식(48, 경기도 의정부시)도 밝게 웃었다. 이들은 이날 23층 외벽에서 1시간 30분 동안 밧줄을 타고 내려오면서 폭 4m 구간을 칠했다. 이렇게 다섯 번씩 오르내리며 일당 30여만 원씩을 챙겼다.
A급 외벽도장공의 경우 하루 일당이 35만원에 달한다. 정씨는 “하루 30만원 벌어서 단순 계산하면 한 달 900만원을 벌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며 “매일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히 이번 여름에는 비가 우리 덜미를 단단히 잡았다”고 밝혔다.
올여름, 비가 많이 왔다. 게다가 자주 내렸다. 중앙SUNDAY가 분석한 지난 6~8월 92일간 중부지방에 비가 조금이라도 온 날은 60일. 0.1㎜ 이상 내려 기상청에서 공식적으로 ‘강수일’로 기록한 날은 45.1일에 이른다. 최근 5년 평균(38.5일)보다 6.6일이 많다. 관측지점 모든 곳에 비가 내리면 강수일수는 1이 되고, 절반의 지점에 내리면 0.5가 된다. 올여름엔 강수량도 많았다. 석 달간 1222㎜(서울·경기)가 내렸다. 최근 5년간 평균 강수량 642㎜의 두 배에 가깝다. 비는 건설노동자의 생활을 침식시켰다.
김지성씨는 “한 달 20일은 나가야 우리 세 식구가 먹고살 만한데, 8월에 14.5일만 일했다”고 말했다. 외벽도장공은 비에 민감하다. 비가 조금이라도 내리면 작업을 할 수 없다. 페인트가 비를 맞고 흘러내리기 때문이다. 비가 중간에 오면 역시 일을 멈춰야 한다. 김씨는 “안전모에 내린 비가 주르륵 흘러 떨어지는 상태를 기준으로, 그날 작업은 끝”이라고 밝혔다. 그가 일당 30여만 원에서 세금과 식비·차비를 빼고 남는 것은 20여만 원. 점심 후 작업을 하다가 오후 2시쯤에 비가 오기도 했다. 그러면 하루 치의 절반만 일당을 받는다. 10여만 원만 손에 들어오는 것이다.
이상기후는 약한 고리부터 파고든다. 경기도 고양시의 한 반지하 세대에 사는 김모(46)씨는 “115년만의 기록적인 폭우로 목숨을 잃은 서울 관악구 신림동 반지하 가족의 일이 남의 일 같지 않다”고 말했다. 다닥다닥 붙은 쪽방촌은 무더위 취약지역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취임하자마자 에어컨 설치 약속을 할 정도다. 이런 쪽방촌 거주자 중에 일용직 노동자들이 많다.
# "한 달 20일은 일해야 식구 먹여 살리는데…"
“에이고, 하늘이 또 왜 이러냐.”
지난달 19일 오후,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신용선(63, 경기도 의정부시)씨는 경기도 동두천시의 공사 현장에서 점심 식사 중 숟가락을 놓으며 말했다. 그는 “비가 내리면 오늘 내 일도 막 내리는 것”이라며 “비가 그치는지, 대기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신씨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한 시간을 기다렸다. 신씨는 결국 하던 일을 멈춰야 했다. 그가 손에 쥔 일당은 12만원. 하루 절반치였다. 이런 상황을 현장 용어로는 '반대가리'로 부른다. 신씨는 “그래도 반타작은 했으니 다행”이라며 씁쓸하게 집으로 향했다.
또 다른 일용직 근로자 권길룡(64, 경기도 양주시)씨는 지난해 대장암 수술을 받았다. 1년을 쉬기로 했다. 실업급여를 신청했다. 건설 일용직 실업급여는 한 달 10일 미만으로 일한 경우와 함께 14일 연속 일이 없을 때 신청할 수 있다. 권씨는 “일용직 중 2주 내리 쉬는 사람은 별로 없다”며 “일감을 놓치면 안 되기 때문에 중간에 하루, 이틀이라도 나가서 일하게 된다”고 밝혔다. 권씨는 “아예 나처럼 일을 못 하게 되는 경우가 아니면 실업급여를 신청하기가 쉽지 않은데, 9개월간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었지만 일이 들어와서 8개월 치만 받고 현장에 나왔다”며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아 맨발로 자갈밭을 밟는 느낌이 들고 팔이 저려도, 일해야 살지 않겠나“라고 토로했다. 그는 현장에서 철근을 옮긴다.
비가 오면 공사장 인근 식당도 타격을 받는다. 서대문구 공사장 앞에서 근로자들에게 한식뷔페를 제공하는 김모(55, 경기도 고양시)씨는 "비가 오면 손님이 절반으로 뚝 떨어지는데, 이번 여름 하루가 멀다 하고 그랬다"고 말했다. 운정신도시의 한 식당 관계자는 "지난 6월에 공사를 시작해 초기 공정에 있는 현장의 인부들 대부분이 오늘(지난달 30일)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난달 25일에도 오전 11시가 조금 넘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경기도의 한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일용직 근로자 김모(62, 경기도 파주시)씨는 조마조마했다. 비가 잦아들면서 작업은 재개됐다. 김씨는 “하루 치 22만원을 받게 돼 다행”이라며 “내일은 또 어떻게 될지 몰라 벌어놔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비가 내려 '어쩔 수 없이' 쉬는 날. 신용선씨가 내뿜는 담배 연기가 쏟아지는 비를 맞고 고꾸라졌다. 권길룡씨는 지난 1일 현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끝나 다른 현장을 수소문하고 있다. 김지성씨는 다음 주 날씨를 검색하고 있다. 이들에게 내일은 있을까. 제11호 태풍 '힌남노'가 올라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