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경의 ‘호이, 채메’
몇 년 전 처음 스위스의 조력 자살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면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조력 자살에 대한 기사 중 스위스 내에서 나온 것과 유럽 내 다른 나라들에서 나온 것들의 논조가 미묘하게 달랐다. 스위스 기사들이 조력 자살 제도를 주로 개인 자유의 상징, 수호해야 할 보루로 보는 반면, 외국 기사들은 이 제도를 예외적인 것, 인간의 생명과 죽음을 논하는 테이블 위에서 한구석으로 밀쳐 놓아야 할 것, 결함이 있어 진지하게 대하기 어려운 제도로 취급하는 느낌이었다. 손에 딱 잡히지는 않지만 이상하게 신경을 긁는 차이 때문에 조력 자살에 대해 더 깊이 알아보고 싶어졌다.
우선 삶을 마감하는 여러 의학적 방식의 차이를 명확히 짚을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마감의 주체다. 안락사(euthanasia)에서는 의사의 판단과 행위가 중요하다. 환자의 상태가 나아질 희망이 있는지, 어떤 선택이 환자에게 더 이로울지에 대한 의학적 검토가 이뤄지고 의사들은 자신의 판단에 책임을 진다. 치명적 약물을 의사가 주입하면 적극적 안락사, 약물 주입 대신 연명 치료를 중지함으로써 환자가 사망하도록 내버려 두면 수동적 안락사다. 2002년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현재 전 세계 7개 국가(벨기에·캐나다·룩셈부르크·네덜란드·뉴질랜드·스페인·콜롬비아)에서 적극적 안락사가 합법이다. 스위스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병 없던 호주 학자 구달. 생 마감 논란
그러자 자살을 돕는 업체들이 생겨났다. 1982년 설립된 스위스 최초이자 최대의 조력 자살 업체 엑시트(EXIT)는 회비를 내는 회원 14만2000명을 보유하고 있다. 스위스 국민 또는 영주권자만 대상으로 한다. 연회비 45스위스프랑(약 6만원) 또는 평생 한 번 1100스위스프랑(약 150만원)을 지불하면 회원 자격을 얻는다. 회원이 된다고 바로 조력 자살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본인이 맑은 정신으로 지속적인 자살 의사를 밝혀야 하고, 외부 압력은 없는지도 심사한다. 엑시트는 매년 3500건 이상의 조력 자살 신청을 받지만 그 중 실제로 승인이 나는 것은 3분의 1 정도다. 스위스의 조력 자살 업체 9곳 중 디그니타스(dignitas) 등 두 곳은 외국인 고객도 받는다. 디그니타스에 따르면 1998년부터 2021년까지 이곳을 통해 자살한 외국인은 총 3460명이다. 독일·영국·프랑스·이탈리아 등 주변국 출신들이 많다. 한국인도 2016년, 2018년, 2021년에 1명씩 총 3명이 디그니타스를 통해 생을 마감했다.
호주의 과학자 데이비드 구달이 특별한 병이 없는데도 104세이던 2018년 스위스 바젤에서 업체의 도움을 받아 생을 마감했을 때도 과연 이게 옳은 일인지 논란이 일었다. 스위스의 조력 자살에는 의학적 판단이나 책임이 차지하는 자리가 다른 나라 제도에 비해 훨씬 좁다. 죽음이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에 달려 있다고 할 때, 그 죽음의 의미를 둘러싸고 어떤 논의를 한들 힘이 빠진다.
자살이 ‘개인의 자유’, ‘신체적 프라이버시’라는 주장의 반대편에는 정부나 의료 시스템이 개인의 죽음을 방조한다는 시각이 있다. 이런 질문을 던져 보자. ‘죽기를 원하는 자는 누구인가?’ 삶이 만족스러운데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극도의 통증으로 고통받는데 해결책이 없거나,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완화 치료로 도움을 받기 어렵거나,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거나, 가족 등 주변 사람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빨리 생의 의지를 놓는다. 스위스는 나라의 경제 규모나 의료비 지출액에 비해 완화 의료 인프라가 한참 떨어지는 나라다. 의료비 지출은 세계 2위지만 완화 의료 시스템은 2000년대 들어서야 정비하기 시작했다.
조력 자살자 성별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남성 자살자가 여성의 3배 정도로 많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2019년 통계에 따르면 스위스의 일반 자살자는 남성(742명)이 여성(276명)의 2.7배였다. 조력 자살은 반대다. 여성(713명)이 남성(483명)의 1.5배였다. 공포스러운 과정을 거치지 않고 편히 죽을 수 있는 선택권이 있을 때 여성이, 그것도 대부분 65세 이상의 여성이 그 선택을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스위스 조력자살, 일반 자살보다 많아
이번 칼럼에서 이 주제를 고른 것은 최근 스위스 조력 자살 제도에 변화의 움직임이 생기고 있어서다. 지난 5월 스위스의학아카데미(SAMS)가 ‘죽는 과정과 죽음에 대한 관리’라는 제목의 가이드라인 개정안을 내놨고, 이를 스위스의학협회(FMH)가 의사들의 의무 조항으로 채택했다. 이 개정안에 따르면 앞으로 의사들은 조력 자살을 원하는 환자와 2주 간격을 두고 최소 두 번 심층 상담을 해야 한다. 또 불치병으로 고통받지 않는 건강한 개인이 조력 자살을 하는 것은 의학적, 윤리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이 가이드라인이 법적 효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스위스의학협회는 이를 따르지 않는 의사를 자체 처벌할 수 있고, 스위스 의사의 90% 이상이 이 협회에 속해 있다는 점에서 현장에 미치는 영향이 클 것으로 보인다. 조력 자살 업체들은 가이드라인 개정안에 크게 반발했다. 2주 간격 상담은 외국인의 자살 관광에 걸림돌이 될 것이고, 고통 증명 조항은 환자의 주관적 느낌을 무시하고 의사의 판단에 지나치게 큰 힘을 실어 준다는 것이다.
현재의 조력 자살 제도에 찬성하는 의견 중 ‘의약 기술이 발전해 평균 수명이 지나치게 길어진 반면 간호 인력난은 극심해 노년층이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한다’는 주장이나 ‘조력 자살이라는 마지막 옵션이 오히려 내 삶의 질을 개선시켰다’는 알츠하이머 환자의 말은 숙고할 만하다. 그러나 간호 인력난이나 알츠하이머 환자의 삶의 질 문제를 ‘자살할 자유’로 해결하는 게 맞는 걸까. 개인의 죽음을 자유와 프라이버시 문제로만 봐도 되는 걸까. 스위스인의 조력 자살자 수는 이미 일반 자살자 수를 넘어섰다. 왜 일반 자살은 사회 문제로 보면서 조력 자살은 개인의 해방구로 인식할까. 자살 관광국 스위스의 조력 자살 제도는 큰 전환기를 맞고 있다.
김진경 스위스 거주 작가. 한국에서 일간지 기자로 일했다. 스페인 남자와 결혼해 스위스 취리히로 이주한 뒤 한국과 스위스의 매체에 글을 기고해 왔다. 저서로 『오래된 유럽』이 있다. 현재 취리히대학에서 인터넷 플랫폼과 그것을 둘러싼 사회의 변화에 대해 공부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