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 플렉스’에 빠진 N포 세대 “돈이 없지 취향이 없냐”

중앙일보

입력 2022.06.18 00:02

수정 2022.06.18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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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청춘들의 속사정 

평범하고 가난한 20대 신입사원 ‘한밀알’의 고급 미식 세계 체험을 통해 이 시대 청춘의 욕망과 애환을 그린 웹툰작가 이자혜. 최영재 기자

“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  
 
3년차 프로 가사도우미 ‘미소’는 하루 한 잔의 위스키와 한 모금의 담배,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친구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다. 집세도 오르고 담배와 위스키 가격마저 올랐지만 일당은 그대로. 결국 미소는 자신이 좋아하는 위스키와 담배가 있는 삶을 위해 ‘집’을 포기하고 친구들의 집을 전전한다.
 
2018년 개봉한 영화 ‘소공녀’의 줄거리를 보면 MZ세대의 특징을 말해주는 신조어 ‘플렉스(flex)’가 떠오른다. 사전적 의미로는 ‘(준비 운동 등으로) 몸을 풀다’ ‘(근육에) 힘을 주다’지만 젊은 층에선 취향을 ‘과시하고’, 취향껏 ‘지른다’는 뜻으로 통용된다. 특히 요즘은 ‘미식 플렉스’가 유행이다. 명품 브랜드 오픈런(매장 문이 열리자마자 달려가 구매하는 행태)은 맘먹고 해야 하지만,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즐기며 SNS에 인증샷을 올리는 일은 MZ세대에서 흔한 주말 풍경이다.
 
그런데 이들 젊은 세대가 과연 풍족한 세대인가 따져보면 그렇지 않다. 대부분이 영화 ‘소공녀’의 미소처럼 하나를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를 얻지 못하는 세대이면서 이들은 왜 ‘취향의 허세’에 이토록 집착할까. 점심은 편의점 도시락을 먹더라도 식후에는 ‘별다방’에서 밥보다 비싼 커피를 꼭 마셔야하는 이들의 허세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


청춘 민낯 그린 웹툰 ‘미지의 세계’ 유명
 

만화책 『밀알의 양식을 주시옵고』

20대 사회초년생의 고급 미식 도전기와 성장담을 담은 이자혜 작가의 만화책 『밀알의 양식을 주시옵고-어느 청년의 미식 데뷔』가 그 답을 들려줄 지도 모르겠다. 가난하고 평범한 20대 ‘한밀알’은 신입사원이 되면서 백반집·편의점·컵밥·샌드위치·학식 쳇바퀴를 멈추고 미식 세계에 입문한다. 오마카세(맡김차림) 스시와 사케, 고급 와인과 디저트 등등 다양한 미식을 접하면서 난생 처음 돈쓰는 맛을 알아버린 밀알. 하지만 그도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이 플렉스를 감당할 수 있을까 겁은 난다. “좋은 것을 알면 안 됐어. 돈을 모을 수가 없잖아. 저렴이에 만족하고 살면 저축도 되고 불만도 없는데. 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거지.”
 
이자혜 작가는 N포 세대(어려운 사회적 상황으로 인해 취업·결혼 등 여러 가지를 포기해야 하는 세대) 청춘들의 민낯을 유쾌·상쾌·통쾌하게 그려낸 웹툰 ‘미지의 세계’로 유명하다. 찌질한 남성 캐릭터는 많지만 ‘미지’만큼 엽기적이면서 욕망에 솔직한 여성 캐릭터는 없었기에 웹툰 시장에선 ‘미지 신드롬’도 불었다. 그랬던 이 작가가 달라졌다. 주인공은 동글동글 예뻐졌고, 매번 쌍코피가 터지던 전작과는 달리 페이지마다 와인과 고기가 흘러넘친다. 하지만 이 작가는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같다”고 한다. 친구 없고, 가난하고, 어리숙하고, 허접한 밀알이 미식 세계를 도전하는 과정을 통해 현실 청년의 애환을 다뤘다는 것. 지갑은 여전히 빈곤한데, 위장만 호사를 누릴 뿐이라고.
 
왜 ‘미식’ 이야기인가.
“음식 자체의 다양한 이미지를 좋아해서 음식만화를 한 번은 그려보고 싶었다. 또 다른 이유는 사람과의 ‘소통’을 이야기하고 싶어서다. 외로운 사람일수록 다양한 음식을 접할 기회가 없고 먹던 것만 먹는다. 돈을 아끼느라, 혹여 자신이 돈을 내게 될까봐 늘 혼자 밥을 먹던 밀알이 사회초년생으로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음식을 접하면서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
 
현실 청년의 애환과 ‘미식 플렉스’는 상반된 조합이다.
“실제로 요즘 젊은 세대가 그렇다. 신입사원 월급에 1인당 한 끼 10만원짜리 식사는 엄청 부담인데 그래도 즐긴다. 제일 만만하기 때문이다. 출신·환경은 가난하지만 미디어를 통해 간접 경험을 많이 한 젊은 세대는 안목이 꽤 높다. 다만 그걸 누릴 돈이 없다. 미식은 골프·호캉스 같은 고급 취향 중 가장 돈이 적게 들고 쉽게 취할 수 있다. 가격대 범위도 넓어서 가끔 저렴이 버전의 노포를 섞어 ‘취향’이라고 변명도 할 수 있다.”
 

웹툰작가 이자혜가 최근 출간한 만화책 『밀알의 양식을 주시옵고』 본문 중 일부. [사진 중앙북스]

언제부턴가 TV 부동산 중개 예능 프로그램 속 화려한 원룸들이 다음번 이사 갈 내 집처럼 친숙하게 다가온다. 넷플릭스 ‘솔로지옥’ 출연자들의 명품 패션은 내 옷 마냥 자연스럽다. 친숙한 사회 집단의 습속·습성 따위를 뜻하는 프랑스어 ‘아비투스(habitus)’에 의해 자신의 경제적·사회적 환경보다 안목이 높아져버린 젊은 세대. 그래서 꿈에서 깬 듯 현실에서 느끼는 상실감은 클 수밖에 없다.
 

웹툰작가 이자혜가 최근 출간한 만화책 『밀알의 양식을 주시옵고』 본문 중 일부. [사진 중앙북스]

홍익대 예술학과를 졸업한 이 작가 역시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우울한 사춘기를 보냈다. 극도의 콤플렉스로 친구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못했고, ‘그림’으로 온라인 커뮤니티 안에서 겨우 소통할 수 있었다. 미식의 천국인 홍대 앞에서 학창시절을 보냈지만 주식은 학식과 편의점 음식. 이 작가는 “미식 판타지가 커진 것은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며 “동화 속 파티 장면처럼 화려한 미식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지만 내가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당연히 욕망도 커졌다”고 했다.
 
밀알의 이야기가 일반적인 음식 에세이나 정보 가이드처럼 다뤄지지 않은 이유다. 이 작가는 “음식에 대한 정보를 다루는 건 내 취향이 아니고 그럴 능력도 없다”며 “친구도 없이 스스로의 욕망을 가둬뒀던 청춘들에게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함께하는 식사의 즐거움을 알게 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밀알은 자신의 미식 경험을 ‘어른의 세계에 다가가는 길’이라고 한다.
“어른이 되는 방법 중에는 다양한 경험도 있다. 지금의 밀알은 경험 자체가 부족하다. 이중에는 스스로 억눌러왔던 경험도 있다. 그 욕망이 취직이라는 기회를 통해 터진 거다. 평소에는 궁상맞지만 오늘만은 플렉스한 양식과 함께 다양한 인간관계를 쌓고, 그들 사이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배우고 싶은 거다.”
  
기성세대에겐 ‘욜로’로 보일 수도
 

웹툰작가 이자혜가 최근 출간한 만화책 『밀알의 양식을 주시옵고』 본문 중 일부. [사진 중앙북스]

밀알은 ‘어른의 세계’란 말을 자주 한다. 예를 들어 공원에서 비싼 디저트 빵과 밀크 티를 먹으면서 바라보던 행복한 가족 풍경을 자신이 가지지 못할 ‘어른의 세계’라고 표현한다. 『커밍업 쇼트-불확실한 시대 성인이 되지 못하는 청년들 이야기』의 저자 제니퍼 M.실바는 “현대의 청년 세대는 전통적인 성인기 지표라고 할 만한 그 어떤 것도 달성할 수 없어서 미래에 대한 기대를 모두 포기한다”고 했다. 성인기 지표란 부모세대가 ‘성장·성공’의 증거로 삼는 일들이다. 괜찮은 일자리를 구하거나, 결혼하거나, 자기 소유의 아파트를 마련하거나, 아이를 낳거나. 그런데 경제적·사회적으로 침체된 지금의 청년들은 이 목표들이 강제로 연기돼 있거나 포기된 상태다. 연애도, 결혼도, 아이를 낳아 가족을 꾸리는 일도, 집을 소유하는 일도 너무나 요원하기 때문이다.
 

웹툰작가 이자혜가 최근 출간한 만화책 『밀알의 양식을 주시옵고』 본문 중 일부. [사진 중앙북스]

밀알같은 청춘들에게 ‘어른의 세계’는 너무 멀리 있다고 이야기하는 건, 이 작가가 ‘미식 플렉스’에 빠진 젊은 세대에도 ‘청춘의 속사정’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대목이다. 기성시대가 보기에 플렉스를 즐기는 청춘들의 모습이 ‘욜로(YOLO·You only live once)’로 보일 수도 있다. 인생은 한 번뿐이니 후회 없이 이 순간을 즐기며 살겠다는 허세. 그런데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욜로는 선택이 아니라 강요된 허세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알은 때로는 궁상맞게, 때로는 아닌 척 허세도 부리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간다. 잦은 야근에 허덕이면서도 언젠가 친구들과 떠날 여름휴가를 상상하고, SNS로 관심사가 맞는 친구를 만나 ‘덕토크(덕후·오타쿠+토크)’를 나누고, 데이팅 어플로 연애 상대를 찾고, 주식에도 소신껏 도전해본다. 군침 도는 음식 그림들 사이마다 MZ세대의 기쁨과 슬픔이 소금과 설탕처럼 뿌려져 있다.
 
프리랜서 웹툰작가로만 살았는데 밀알의 현실 이야기는 어떻게 담아냈나.
“실제 직장인들이 직접 올리는 브이로그(영상 블로그)와 유튜브를 참조하고 지인들을 통해 신입사원 취재도 많이 했다. 다만, 취업과정이 의외로 쉬웠던 것, 회사라는 조직 안에도 꽤 괜찮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잘 생긴 상사도 있다는 것은 나의 상상력이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