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청춘들의 속사정
3년차 프로 가사도우미 ‘미소’는 하루 한 잔의 위스키와 한 모금의 담배,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친구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다. 집세도 오르고 담배와 위스키 가격마저 올랐지만 일당은 그대로. 결국 미소는 자신이 좋아하는 위스키와 담배가 있는 삶을 위해 ‘집’을 포기하고 친구들의 집을 전전한다.
2018년 개봉한 영화 ‘소공녀’의 줄거리를 보면 MZ세대의 특징을 말해주는 신조어 ‘플렉스(flex)’가 떠오른다. 사전적 의미로는 ‘(준비 운동 등으로) 몸을 풀다’ ‘(근육에) 힘을 주다’지만 젊은 층에선 취향을 ‘과시하고’, 취향껏 ‘지른다’는 뜻으로 통용된다. 특히 요즘은 ‘미식 플렉스’가 유행이다. 명품 브랜드 오픈런(매장 문이 열리자마자 달려가 구매하는 행태)은 맘먹고 해야 하지만,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즐기며 SNS에 인증샷을 올리는 일은 MZ세대에서 흔한 주말 풍경이다.
그런데 이들 젊은 세대가 과연 풍족한 세대인가 따져보면 그렇지 않다. 대부분이 영화 ‘소공녀’의 미소처럼 하나를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를 얻지 못하는 세대이면서 이들은 왜 ‘취향의 허세’에 이토록 집착할까. 점심은 편의점 도시락을 먹더라도 식후에는 ‘별다방’에서 밥보다 비싼 커피를 꼭 마셔야하는 이들의 허세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
청춘 민낯 그린 웹툰 ‘미지의 세계’ 유명
이자혜 작가는 N포 세대(어려운 사회적 상황으로 인해 취업·결혼 등 여러 가지를 포기해야 하는 세대) 청춘들의 민낯을 유쾌·상쾌·통쾌하게 그려낸 웹툰 ‘미지의 세계’로 유명하다. 찌질한 남성 캐릭터는 많지만 ‘미지’만큼 엽기적이면서 욕망에 솔직한 여성 캐릭터는 없었기에 웹툰 시장에선 ‘미지 신드롬’도 불었다. 그랬던 이 작가가 달라졌다. 주인공은 동글동글 예뻐졌고, 매번 쌍코피가 터지던 전작과는 달리 페이지마다 와인과 고기가 흘러넘친다. 하지만 이 작가는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같다”고 한다. 친구 없고, 가난하고, 어리숙하고, 허접한 밀알이 미식 세계를 도전하는 과정을 통해 현실 청년의 애환을 다뤘다는 것. 지갑은 여전히 빈곤한데, 위장만 호사를 누릴 뿐이라고.
- 왜 ‘미식’ 이야기인가.
- “음식 자체의 다양한 이미지를 좋아해서 음식만화를 한 번은 그려보고 싶었다. 또 다른 이유는 사람과의 ‘소통’을 이야기하고 싶어서다. 외로운 사람일수록 다양한 음식을 접할 기회가 없고 먹던 것만 먹는다. 돈을 아끼느라, 혹여 자신이 돈을 내게 될까봐 늘 혼자 밥을 먹던 밀알이 사회초년생으로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음식을 접하면서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
- 현실 청년의 애환과 ‘미식 플렉스’는 상반된 조합이다.
- “실제로 요즘 젊은 세대가 그렇다. 신입사원 월급에 1인당 한 끼 10만원짜리 식사는 엄청 부담인데 그래도 즐긴다. 제일 만만하기 때문이다. 출신·환경은 가난하지만 미디어를 통해 간접 경험을 많이 한 젊은 세대는 안목이 꽤 높다. 다만 그걸 누릴 돈이 없다. 미식은 골프·호캉스 같은 고급 취향 중 가장 돈이 적게 들고 쉽게 취할 수 있다. 가격대 범위도 넓어서 가끔 저렴이 버전의 노포를 섞어 ‘취향’이라고 변명도 할 수 있다.”
밀알의 이야기가 일반적인 음식 에세이나 정보 가이드처럼 다뤄지지 않은 이유다. 이 작가는 “음식에 대한 정보를 다루는 건 내 취향이 아니고 그럴 능력도 없다”며 “친구도 없이 스스로의 욕망을 가둬뒀던 청춘들에게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함께하는 식사의 즐거움을 알게 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 밀알은 자신의 미식 경험을 ‘어른의 세계에 다가가는 길’이라고 한다.
- “어른이 되는 방법 중에는 다양한 경험도 있다. 지금의 밀알은 경험 자체가 부족하다. 이중에는 스스로 억눌러왔던 경험도 있다. 그 욕망이 취직이라는 기회를 통해 터진 거다. 평소에는 궁상맞지만 오늘만은 플렉스한 양식과 함께 다양한 인간관계를 쌓고, 그들 사이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배우고 싶은 거다.”
기성세대에겐 ‘욜로’로 보일 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알은 때로는 궁상맞게, 때로는 아닌 척 허세도 부리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간다. 잦은 야근에 허덕이면서도 언젠가 친구들과 떠날 여름휴가를 상상하고, SNS로 관심사가 맞는 친구를 만나 ‘덕토크(덕후·오타쿠+토크)’를 나누고, 데이팅 어플로 연애 상대를 찾고, 주식에도 소신껏 도전해본다. 군침 도는 음식 그림들 사이마다 MZ세대의 기쁨과 슬픔이 소금과 설탕처럼 뿌려져 있다.
- 프리랜서 웹툰작가로만 살았는데 밀알의 현실 이야기는 어떻게 담아냈나.
- “실제 직장인들이 직접 올리는 브이로그(영상 블로그)와 유튜브를 참조하고 지인들을 통해 신입사원 취재도 많이 했다. 다만, 취업과정이 의외로 쉬웠던 것, 회사라는 조직 안에도 꽤 괜찮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잘 생긴 상사도 있다는 것은 나의 상상력이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