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탄철교에 부러진 38선 표지, 77년 분단의 상처 보여줘

중앙일보

입력 2022.05.14 00:02

수정 2022.05.14 00:09

SNS로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2〉 미국·소련이 그은 38선 

경기도 연천군 한탄 철교 남단의 부러진 38선 표지석. [사진 윤태옥]

한국전쟁은 38선에서 시작했고 휴전선에서 끝났다. 북위 38도는 백령도의 심청각 앞바다와 개성시 북단과 양양을 잇는 선이다. 육지의 군사분계선 남쪽에서 가장 서쪽의 38선은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마현리다. 북위 38도가 동경 126도 80분에서 군사분계선과 만난다. 연천의 경순왕릉에서 서북서 방향으로 3.6㎞ 정도 된다. 일반인들은 들어갈 수 없다.
 
군사분계선 남쪽의 38선이 가장 서쪽에서 만나는 일반도로는 파주시 장남면 원당리 255-1, 372번 도로의 어느 캠핑장 입구이다. 북위 38도를 표시한 첫 번째 표지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연천군 백학면 통구리 453-1에 있다. 커다란 자연석에 ‘아! 38선’이란 문구가 굵직하고도 깊은 획으로 새겨져 있다. 통구리 동쪽으로 더 가면 파주군 적성면 어유지리에 있는 황우마을의 앞길도 38도다. 동쪽으로 더 가서 연천군 전곡읍 양원리의 어느 골프장 근처에서도 38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38선 표지 대부분 전쟁 끝난 후 세워
 

1945년 해방 직후 38선을 측량 중인 미군. [사진 경기도]

38선에 38선 표지가 꽤 많지만, 연천의 한탄철교 남단에 설치된 것이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다. 이곳은 한탄대교·한탄교·한탄철교 세 개의 다리가 나란히 한탄강을 건너고 있다.  작은 공원이란 느낌이 든다.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는 한탄철교만 있었다. 이곳에 한국전쟁과 관련된 몇 개의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38선돌파기념비는 1951년 5월 28일 유엔군이 세 번째 38선을 돌파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38선돌파기념비 옆 철로 가까이에 두 개의 38선 표지가 있다. 하나는 큼직한 자연석에 ‘38선’이라고 새겨져 있다. 또 하나는 가로세로 1m 정도인데 낡은 데다가 허리가 부러진 채 상단이 땅에 누워있어 눈에 잘 뜨이지 않는다. 두 표지의 중간에 세워진 반들반들한 화강암 안내표지가 부러진 표지의 내력을 알려주고 있다.
 
이 파손된 38선 옛 표지석은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에 미국과 옛 소련의 합의로 세워졌다. ‘6·25전쟁으로 인해 역사적인 38선 표지석이 파손되어 있던 중 1991년 9월 바로 그 옆에 38선 경계비를 다시 건립하고, 파손된 옛 38선 표지석은 파손된 상태로 기념물로 보존하기로 하였다. 2016년 4월 대한민국 6.25참전기념자회 연천지회.’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통구리의 ‘아, 38선’ 표지석. [사진 윤태옥]

이 작은 공원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부러진 콘크리트 표지다. 내가 찾아다닌 38선 표지 대부분은 전쟁이 끝나고 한참 후에 세워진 것들이지만, 이것만은 1945년 9월 미군과 소련군이 합의해서 세운 것이란다. 38선은 그들끼리 논의하고 결정하고 실행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가장 직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모서리는 부서지고 표면은 시커멓게 변해버렸다. 38선의 77년 세월이 진하게 느껴진다.
 
미군 7사단을 태운 함정이 인천 월미도 앞바다에 정박한 것은 1945년 9월 8일이고 이튿날 서울에 들어왔으니, 이 표지가 설치된 것은 9월 중순 정도가 아니었을까. 38선에 먼저 도착한 것은 소련군이었다. 그들은 8월 27일 경원선과 경의선 열차의 38선 통과를 중지시켰고, 이어서 금천·신마·연천·평강·양양 등에 경비부대를 배치했다. 남하 속도로 보면 소련군은 서울을 손도 안 대고 점령할 수 있었다. 미국은 이런 사태를 우려했지만, 소련은 합의를 위반하지 않았다. 8월 16일 서울에서는 조선총독부가 소련군이 경원선 열차를 타고 곧 서울역에 들이닥친다고 오인하고 있었고, 그런 소문이 파다했다. 이로 인해 시청 광장의 집회에서 해방을 만끽하던 군중들이 서울역으로 환영을 나갔다가 헛걸음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이런 표지 앞에서 미군과 소련군이 해방군인가 점령군인가 하는 논의는 별 의미가 없다. 당시의 말이든 훗날의 결과든 관계없이 그 시점에서 두 나라 군대는 엄연한 점령군이었다. 9월 7일 미국의 태평양 방면 육군총사령관 맥아더는 ‘조선 인민에게 고함’이라는 포고령 제1호를 발표했다. 미군이 서울에 들어온 9월 9일, 점령군 사령관 하지는 조선총독 아베(阿部信行)로부터 항복을 접수했다. 총독부 청사에는 오후 4시 반 일본 국기가 내려오고 미국 국기가 올라갔다. 이로써 미국의 점령통치, 곧 군정 3년이 실효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조선을 대표하는 정부로서는 거부당했다. 임정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입국한다는 각서까지 쓰고서야 미군 군용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소련군도 마찬가지였다. 중국 관내에서 만주 지역으로 이동해온 조선의용군 선견종대는 선양에서 단둥(당시의 안동)을 거쳐 압록강 다리를 건넜다. 그들은 군악대를 앞세우고 신의주로 들어왔으나 소련군은 포츠담선언 위반이라며 무장해제를 하려 했다. 선견종대는 발길을 돌렸다. 목숨 바쳐 구하겠다던 조국에 돌아오자마자 점령군에 의해 쫓겨난 것이다. 1945년 11월 조선의용군 대원들이 선양에 집결했으나 소련은 이 부대에 대해서도 귀국을 불허했다. 해방이라 할 수 있지만 반쪽의 해방이었고, 달리 표현하면 점령군 교체였을 뿐이었다. 그렇게 우리 땅을 점령한 두 나라의 군대가 직접 합의해서 세운 38선 표지가 바로 여기, 연천대교 남단에 남아 있는 것이다.
 
38선이 그어진 과정은 우리가 아는 그대로다. 1943년 카이로회담에서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키는 것으로 연합국 수뇌들이 합의했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이를 재확인하면서 한 국가에 의한 점령은 정치적 반발이 일어날 우려가 있으니 중앙집권적 군정청을 설치하기로 했다. 그러나 뒤에 열린 연합군 참모장 공동회의에서 미군과 소련군이 분할 점령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전혀 모르는 가운데 정해져 갔다. 제 손으로 해방을 이루지 못한 대가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혹독한 운명이 그들의 손에서 만져지고 있었던 것이다.
 
1945년 8월 6, 9일 일본에 원자탄이 잇달아 투하되고, 8월 9일 소련은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만주로, 함경북도로 들이닥쳤다. 일본은 8월 10일 무조건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연합국 측에 전달했다. 이를 예상치 못했던 미국은 서둘러 한반도의 일본군 무장해제 방안을 강구했다. 미국은 38선 분할을 제시했고 소련은 바로 동의했다. 무장해제를 위한 분할점령 방안을 급히 준비하면서 지도 위에 38선을 직접 그은 인물은 미국 전쟁성(국방부)에서 일하던 찰스 본스틸 대령과 딘 러스크 중령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군·소련군은 해방군 아닌 점령군
 

경기도 연천군 한탄대교 남단의 38선 표지석.

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무조건 항복’을 고했다. 바로 그날, 강원도 김화의 한 아이는 자맥질하며 놀다가 일본의 항복방송을 알게 됐다. 아이는 그날 저녁 엄마가 몸뻬를 벗어 던지고 흰 치마저고리로 갈아입는 걸 의아스럽게 쳐다봤다. 엄마를 따라간 아이는 군청 앞 공터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거의 모두 흰색 한복을 입고 모였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군청 현관의 상자 위에서는 흰색 셔츠 차림의 한 조선인이 조선어로 목청 높여 연설하고 있었다. 마쓰야마라는 이름으로 권세를 부리던 조선인 철원군수였다. 높은 사람이 국방색이나 검정색 정장이 아닌 흰 셔츠 바람으로, 게다가 조선말로 연설하다니, 아이에게는 더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마쓰야마 군수는 어제까지 황군신민과 내선일체와 옥쇄를 부르짖었으나 그날은 그의 조선말 선창으로 군중들이 “조선독립만세”를 따라 외쳤다. 아이도 외쳤다. 그러나 마쓰야마 군수가 그날 밤 큰 가방에 군청의 현금 뭉치를 채운 채 경성으로 도망쳤다는 소문을, 아이도 들었다. 그 아이는 원로 언론인 임재경이다. 그의 회고는 야릇한 뉘앙스가 묻어 있는 뜨거운 그날을 회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해방은 뜨거운 감격이었으나 마쓰야마 군수의 도주는 해방이 분단과 전쟁으로 가는 복잡한 정세의 소리 없는 시작이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윤태옥 답사여행객 kimyto@naver.com
지난 15년 동안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역사와 자연과 문화를 찾아다니고 있다. 최근 2년은 한국전쟁을 주제로 한 휴전선 지역, 바다의 역사를 주제로 한 서해·남해·제주 지역을 지속해서 답사했다. 올해에는 바다의 역사 해외 여정을 시작한다. 여행하면서 『변방의 인문학』 『중국에서 만나는 한국독립운동사』 『길 위에서 읽는 중국현대사 대장정』 『중국 민가기행』 『중국식객』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