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파멸 원하면 광기 먼저 준다"...90세 추기경도 체포한 홍콩

중앙일보

입력 2022.05.12 15:36

수정 2022.05.12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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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기자회견에 참석한 조셉 젠 전 추기경. 로이터=연합뉴스

“옳고 바른 말이 그들이 만든 법에 위배된다면 나는 모든 고소와 재판, 체포를 감내하겠습니다. 그들은 진짜 미쳤을지도 모르죠. 그냥 그렇게 내버려 둡시다. ‘신은 인간의 파멸을 원하면 광기를 먼저 내린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2020년 7월)
 
천주교 홍콩교구 제6대 교구장을 지낸 조셉 젠(90) 추기경이 당시 홍콩국가보안법 시행에 부쳐 한 말은 2년 만에 현실이 됐다. 홍콩 경찰은 11일(현지시간) 젠 주교와 마거릿 응(74) 전 입법회 의원, 가수 데니스 호(45), 후이포컹 전 링난대 교수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고 뉴욕타임스(NYT) 등이 이날 보도했다. 이들은 ‘612 인도주의 지원기금’ 신탁관리자로, 외세와 결탁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당국은 이날 밤늦게 이들을 보석으로 석방했지만, 국가보안법에 따라 여권을 몰수했다.
 
홍콩국가보안법은 국가 분열, 국가 정권 전복, 테러 활동, 외국 세력과의 결탁 등 4개 범죄를 최고 무기징역형에 처하는 법이다. 지금까지 최소 175명이 관련 혐의로 체포됐고, 110명 넘게 기소됐다. ‘612 인도주의 지원자금’은 2019년 설립돼 홍콩 민주화 시위 참여자들에게 법적 비용과 의료비 등으로 2억4300만 홍콩달러(약 396억원) 이상 지원했다. 지난해 10월 홍콩 당국이 기부자와 수령인 정보를 요구하자 자진 해산했다.
 

상하이 출신 ‘홍콩의 양심’ 

조셉 젠 전 추기경이 2012년 7월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는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젠 추기경은 1932년 상하이에서 태어났지만, 1948년 홍콩으로 이주했다. 1961년 사제 서품을 받고 로마 교황청이 세운 살레시오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6년 추기경으로 임명됐다가 2009년 은퇴했다. 홍콩 내 대표적인 반중 인사로, 지지자들 사이에서 그는 ‘홍콩의 양심’으로 통한다. 2014년 우산혁명과 2019년 민주화 시위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은퇴 후에도 여전히 홍콩 민주화 진영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지난 2018년엔 중국 정부의 주교 임명권을 인정한 바티칸을 향해 ‘배신’이라며 “중국의 지하교회 교인들을 팔아넘겼다”고 강력히 비난했다. 중국 가톨릭은 교황이 임명한 주교 30여명이 관장하는 ‘지하교회’와 정부가 임명한 주교 7명이 공산당의 통제 아래 이끄는 ‘공식 교회’로 나뉜다.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과 존 리 행정장관 당선인도 가톨릭 신자다.  
 

조셉 젠 전 추기경(왼쪽)은 2020년 4월 16일.교황 베네딕토 16세의 93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 그는 "중국에서 박해받는 교회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썼다. [사진 페이스북]

그의 체포를 두고 CNN은 “(지난 8일) 소수의 엘리트 유권자들이 (국가보안법 적극 지지자인) 존 리를 행정장관으로 선출한 지 며칠 만에 이뤄졌다”며 “논란의 국가보안법 시행 이후 저명한 홍콩 민주화 인사 대부분이 체포되고 많은 언론사와 단체들이 폐쇄한 가운데 이뤄진 최신의 홍콩 민주화 운동 탄압 사례”라고 지적했다. 특히 존 리 당선인이 취임하는 7월 1일 이후엔 공안정국은 더 강화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각계에선 우려와 비난이 제기됐다. 교황청은 “젠 추기경의 체포 소식을 우려 속에 접했고 상황을 극도로 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휴먼라이츠워치는 “90세 추기경의 체포는 홍콩 인권 추락의 상징으로, 존 리 이후 탄압이 고조될 것이란 불길한 신호”라고 했고, 국제앰네스티는 “‘외세 결탁’ 혐의는 국가보안법의 악용 가능성을 다시 보여줬다”고 꼬집었다. 카린 장-피에르 백악관 대변인은 “홍콩 지지자 탄압을 중단하고 부당하게 구금되고 기소된 이들을 즉각 석방하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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