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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백억 포기하고 '기부앱' 만들었다…신애라에 포섭된 그녀 [추기자의 속엣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추기자의 속엣팅

한 사람의 소개로 만나 속엣말을 들어봅니다. 그 인연을 통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요. 인연 따라 무작정 만나보는 예측불허 릴레이 인터뷰를 이어갑니다.

 [프롤로그] 배우 신애라가 참여하는 자선단체 ‘야나’(You Are Not Alone)는 블록체인 기부플랫폼 ‘체리’에서 기부와 봉사 신청을 받습니다. ‘체리’는 다양한 자선단체들을 쇼핑하듯 선택해 기부할 수 있는 플랫폼입니다. 야나 입점을 논의하다가 “신애라에 포섭돼서” 야나인이 됐다는 이수정(58) 이포넷(E4net) 대표가 만들었죠. 체리에서 결제하는 기부금은 금융사에 들어가는 결제수수료 외에 100% 기부단체에 전달됩니다. ‘퍼네이션’(fun+donationㆍ즐거운 기부)을 이끄는 이 대표를 만났습니다.

이수정 이포넷 대표가 11일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이포넷 본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8년 ICO(가상화폐공개)만 하면 몇 백억원씩 벌던 시절 이 대표는 오히려 돈을 들여 기부플랫폼 ‘체리’를 만들었다. 김현동 기자

이수정 이포넷 대표가 11일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이포넷 본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8년 ICO(가상화폐공개)만 하면 몇 백억원씩 벌던 시절 이 대표는 오히려 돈을 들여 기부플랫폼 ‘체리’를 만들었다. 김현동 기자

“돕자니 돈은 없고 안 돕자니 죄책감 들잖아요? 기부도 쇼핑처럼 재미있게 ‘힙 ’하게 할 순 없나 자나 깨나 그 생각만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이수정(58) 이포넷(E4net) 대표는 항상 ‘여성 1호’ 였다. 서강대 전자계산학과(현 컴퓨터공학) 82학번인 그는 회사에 “추천 명단에 여자 한 명 끼워 보내겠다”고 통보한 지도교수 덕분에 남녀 통틀어 1등으로 대영전자 최초 여성 공채 직원이 됐고, 벤처기업을 거쳐 1994년 첫 여성 대리로 BC카드에 입사했다. 금융권 인사적체가 심해 남자들도 승진시험에 합격하고도 몇 년간 오르기 힘든 자리였다.

‘여성 1호’ 공채·대리·IT사업가

이수정 대표는 아픈 아이를 돌보기 위해 '여성 1호' 대리로 입사한 BC카드를 퇴사했다. 선배들이 맡겨준 프로젝트를 하느라 어쩔 수 없이 사업자등록증을 내고 '여성 1호' IT 사업가가 됐다. 김현동 기자

이수정 대표는 아픈 아이를 돌보기 위해 '여성 1호' 대리로 입사한 BC카드를 퇴사했다. 선배들이 맡겨준 프로젝트를 하느라 어쩔 수 없이 사업자등록증을 내고 '여성 1호' IT 사업가가 됐다. 김현동 기자

창업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두 번의 유산 끝에 어렵게 낳은 아이가 병원을 오가는 상황에서 회사 생활을 병행할 순 없었다. 그는 지난 11일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이포넷 본사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내가 못하면 여자가 못하는 게 되니까 잘하려고 밤을 새워 일해도 아이가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퇴사를 하기도 전부터 선배들이 배려 차원에서 맡겨준 프로젝트가 6000만원 어치였다. 1995년 집에서 사업자등록증을 내고 ‘여성 1호’ IT 사업가가 됐다. 첫 회사에서 연구원으로 만난 남편도 삼성전자를 나와 합류했다.

이 대표는 1997년부터 조달청과 일하고 있다. 1990년 선배 따라갔던 벤처기업에서 당시 최첨단 전자문서교환(EDI) 업무를 해본 덕분에 직원 4명뿐인 회사가 ‘나라장터’ 컨소시엄에 합류한 것. 이후 대기업 입찰이 줄줄이 들어왔고 직원도 12명으로 늘렸다. 그런데 IMF 위기가 터졌다. 받아야 할 현금을 어음으로 주겠다는 은행에 주저앉아 펑펑 울기도 했다. 8개월 동안 일이 안 들어와 여기저기서 돈을 빌리던 와중에 채용을 약속했던 아르바이트생까지 받았고, 그 직원이 지금도 재직 중이다.

IMF가 끝나도 둘째를 품은 임산부에게 일을 맡기려는 회사는 없었다. 그때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사의 기술 리뷰를 맡았다가 번역 파트너로 이어지면서 회사는 다시 성장했다. 그러다 2002년 람다 바이러스 사태가 터지자 MS 본사에선 그에게 책임을 몰아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다시 어려움에 부닥친 그는 전에 몸담았던 BC카드 덕분에 재기했다. 전 동료가 2002년 우연히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그를 보고 일을 의뢰했다. 양사 관계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씩 늘리다 보니 정관엔 “수익 10% 기부” 

중학교 2학년 때 남대문시장 화재로 순직한 소방관 아버지를 잃은 이수정 대표는 "대학을 나온 것도, 회사를 꾸린 것도 결국 다 사회에 빚을 진 것"이라고 했다. 김현동 기자

중학교 2학년 때 남대문시장 화재로 순직한 소방관 아버지를 잃은 이수정 대표는 "대학을 나온 것도, 회사를 꾸린 것도 결국 다 사회에 빚을 진 것"이라고 했다. 김현동 기자

이 대표가 기부를 본격화한 건 20여년 전 한 인터뷰를 보고서다. 수익의 1%를 기부한다는 한 최고경영자(CEO)를 따라 시작해 기부를 1%씩 늘리다 아예 “수익의 10%를 기부한다”는 내용을 회사 정관에 넣었다. 2007년 모범 중소기업 대통령 표창부터 2020년 산업자원부 백만불 수출탑 등 각종 상도 받았다. 중학교 2학년 때 소방관이던 아버지가 남대문시장 화재진압 도중 순직한 뒤 학교 등록금도 못 낼 정도로 어렵게 살았다던 그는 “대학을 나온 것도, 회사를 꾸린 것도 결국 다 사회에 빚을 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기부를 하다 보니 불편하고 어려운 상황들이 생겼다. 후원금을 개인계좌로 보내거나 친하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피하기도했다. 남편은 “빌려달라고 해도 피하는데 그냥 달라고 하니 피하는 게 당연하다”는 핀잔 아닌 핀잔을 했다. 기부 플랫폼을 만들기로 했다. “인맥을 동원해 기부하는 건 나중에 현직을 떠나선 어려워진다. 물고기를 잡아주는 게 아니라 물고기 잡을 플랫폼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서다.

블록체인 기술이 가장 핫하던, 2018년 ICO(가상화폐공개)만 하면 몇백억원씩 벌던 그 시절 이 대표는 오히려 돈을 들여 ‘체리’를 만들었다. ‘여성’이란 꼬리표도 뗐다. 체리는 국내 최초 블록체인 기반 기부플랫폼이다.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수수료 없이 모금하고 기부할 수 있다. 처음엔 체리를 다른 기구에 넘기려고 했지만, 2019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진행한 15억원 규모의 블록체인 민간주도 국민프로젝트에 당선되면서 그의 운명도 갈렸다.

“생활 속 기부 만드는 틀 되길”

이수정 대표가 국내 최초 블록체인 기반 기부플랫폼 '체리'를 설명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이수정 대표가 국내 최초 블록체인 기반 기부플랫폼 '체리'를 설명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돈을 받은 만큼 일을 해야 하잖아요. 1년 내내 업그레이드해서 다시 내놨죠. 수능 접수할 땐 몇 번 에러 나면 욕하면서도 하지만, 기부는 세 번 이상 에러 나면 안 하거든요.” 체리는 기부 외에도 자선단체 웹사이트나 앱 제작 등 다양한 기능을 갖췄다. 하지만 수수료가 없다 보니 수입도 없다. “이포넷 직원 160명이 체리 직원 20명에게 월급을 주는 셈”이다. 이 대표는 “체리의 수익 모델을 만들어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그는 ‘풀뿌리 기부’를 꿈꾼다. “어른이든, 어린이든, 돈이 있든, 돈이 없든, 모두가 기부를 생활처럼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기업과 연계해 걷기나 댄스 챌린지 등을 통해 재미있게 기부하자는 ‘퍼네이션’(fun+donation)을 추구한다. “기부도 쇼핑처럼 나도 모르게 빠져들 수 있어요. 체리가 생활 속 기부를 만들어내는 틀이 되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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