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에이징
유럽 정상들, 배우자 동반 않고 해외 출장
유럽에는 동화 속 왕실이 ‘군림하지만 통치하지 않으면서(reign but not rule)’ 국가의 상징으로 존재하는 나라가 많다. 민주주의와 왕실은 얼핏 이율배반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유럽의 왕족은 아이돌급 인기를 누리면서 국민적 사랑을 받는다. 일례로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세 살 때 노란색 원피스를 입고 타임지(1929년 4월 29일판) 표지 모델로 등장해 소녀들의 노란 원피스 대유행을 일으켰고, 90여 년 뒤 기성복 시대에 태어난 증손녀 샬럿 공주는 출생 직후부터 사진이 공개될 때마다 입은 옷이 순식간에 완판되는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현존하는 왕족 때문인지 유럽인들은 최고 권력자의 배우자에 대해 국민적 관심이 많지 않다.
현대사에서 세계인의 이목과 사랑을 받은 대표적인 영부인은 미국의 35대 케네디 대통령 부인 재클린이다. 세계 최강 대국 43세 훈남 대통령의 31세 아내는 존재 자체로 빛난다. 게다가 그녀는 어릴 때부터 승마와 발레로 다져진 170㎝의 멋진 몸매와 뛰어난 패션 감각까지 지녔다. 또 문학과 예술 분야의 지식, 세련된 매너와 대화 기술, 4개 외국어 구사 등 사교계 여왕이 될 소양도 갖췄다.
백악관 안주인이 된 재클린은 최고급 패션이라는 날개를 달면서 미국의 영원한 영부인이 됐다.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재키룩(Jackie Look)으로 당대의 패션 아이콘이 된 재클린은 미국인들의 유럽에 대한 문화·예술적 열등감도 꽤 해소시켜 주었다.
케네디도 “패션이 정치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이 내 연설보다 재키의 옷에 더 집중하곤 하거든요”라는 말로 재클린의 성공적인 패션 정치를 인정했다.
하지만 그녀의 패션을 위한 구매광(購買狂)적 소비는 케네디를 현실적으로 괴롭혔다. 실제 영부인이 된 지 16개월 만에 부자 시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마련한 5만 달러의 3분의 2를 소비했다. 당시(1961년)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2926달러(한국 93달러)였으니 지금 기준에서 보면 1년에 10억원 정도를 옷값으로 쓴 셈이다. 그녀의 사치성 소비는 5년 후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와 재혼하면서 절정에 달해 세계적인 갑부 남편이 분노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재클린의 구매 행동은 쇼핑 중독에 해당할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정신의학적으로 쇼핑중독은 행동중독의 한 종류다〈표 참조〉. 쇼핑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면서 수시로 자신의 경제력을 초과하는 물건을 구매하는 질병이다. 유병률은 2~8%며 여성이 남성보다 10배쯤 많다.
쇼핑중독에 빠지는 과정은 술이나 마약 같은 물질중독과 같다. 즉, 쇼핑을 하면 뇌에서 쾌감을 주는 도파민이 분비되고 뇌는 그 느낌을 기억한다. 이후 계속해서 쇼핑을 갈망하게 하는 ‘보상 회로’를 작동시킨다. 이때 뇌에 생물학적 변화가 일어나면서 중독 상태가 된다. 중독은 내성과 금단증상 때문에 치료가 쉽지 않다. 내성은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요구하며, 금단증상은 중독 원인을 멀리하면 불안과 초조에 시달리게 한다. 예컨대 쇼핑중독 환자는 시간이 갈수록 쇼핑을 하는 양과 횟수가 늘어나며 자제하면 불안감과 초조감이 심해져 결국 쇼핑에 나선다.
케네디, 부인 재클린의 ‘패션 정치’ 인정
쇼핑중독의 가장 큰 특징은 잦은 충동구매로 법적, 경제적, 사회적 문제를 초래한다는 점이다. 즉, 고가품을 아무리 많이 구매해도 경제적 능력이 되면 과소비일 뿐 쇼핑중독은 아니다. 재클린은 1994년 사망 당시 4000만 달러(한화 약 500억원)라는 거액의 유산을 남겼다. 엄청난 사치품 구매는 부호 시아버지와 남편을 믿고 한 과소비였던 것이다. 반면 수입이 200만원인 사람이 매달 300만원씩 쇼핑을 하다가 카드대금이 연체되고 신용불량자가 된다면 쇼핑중독에 해당한다.
첨단 정보통신 기술과 자본주의가 발달한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 대한민국은 쇼핑중독자가 양산되기 좋은 환경이다. 따라서 사회적 영향력이 큰 지도층 인사들은 화려함보다 소박한 모습으로 대중에게 다가갈 필요가 있다. 그래야 쇼핑중독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재클린처럼 사비(私費)로 국격을 높이는 패션 정치조차 조심스러운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