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써넣은 1100명 살아남았다...'쉰들러 리스트' 숨은 주인공

중앙일보

입력 2022.04.13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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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라인하르트 [유튜브 캡처]

1000개 넘는 이름이 그의 손에 넘겨졌다. 그가 써넣기만 하면 살 수 있는 이들이다. ‘쉰들러 리스트’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독일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의 유대인 비서 미미 라인하르트는 ‘타이피스트’로 자신의 이름을 목록에 넣었다. “타이핑을 배운 적 없다”던 오스트리아계 유대인은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107세까지 장수를 누린 뒤 지난 8일(현지시간) 숨졌다. 그의 일생을 뉴욕타임스가 13일 조명했다.
 

타이핑한 이름들 가스실 대신 공장으로

미미 라인하르트의 아들 사샤 비트만이 11일(현지시간) 어머니의 사진을 들어보이고 있다. AP=연합뉴스

라인하르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 크라쿠프 근처 나치 노동 수용소에 갇혀있었다. 타이피스트는 아니었지만 속기를 알고 독일어가 유창한 덕분에 사무직으로 발탁됐다. 쉰들러도 처음부터 영웅은 아니었다. 크라쿠프 근처에서 공장을 운영하던 사업가인 그는 독일 당국에 뇌물을 바쳐 돈을 벌고 여성과 술에 심취했다. 유대인들을 고용한 것도 처음엔 노동력을 착취하려던 것이었다고 한다.
 
쉰들러는 그러나 나치의 악랄한 만행을 목격하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전쟁하려면 공장을 가동할 노동자들이 필요하다”면서 작성한 노동자 목록엔 어린이와 여성, 환자들이 다수 포함됐다. 쉰들러는 크라쿠프 수용소에서 라인하르트에게 400개 이름을 건네며 타이핑을 지시했다. 이후 매일 새로 받은 이름을 타이핑했고 목록에 들어간 이름은 1100개가 넘었다. 이들은 가스실 대신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장으로 보내져 살아남았다.
 
라인하르트는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한 요양원에서 107세를 일기로 숨졌다. 쉰들러의 이야기는 1982년 호주 작가 토마스 케닐리가 미국에서 출간한 소설 『쉰들러의 방주』를 시작으로 1993년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로 널리 알려졌지만, 영화에선 라인하르트의 존재가 다뤄지지 않았다. 라인하르트는 92살이던 2007년 미국에서 이스라엘로 이주한 후 정착을 돕던 이스라엘 비영리단체에 쉰들러와의 인연을 이야기했고, 언론에 알려지면서 유명 인사가 됐다.


대학 입학 전 배운 속기가 운명 갈라

독일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의 지시로 미미 라인하르트가 직접 타이핑한 '쉰들러 리스트'. [유튜브 캡처]

그는 1915년 오스트리아 비너노이트슈트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카르멘 코펠이었지만 미미로 바꿨다. 오페라를 좋아하던 사업가 아버지가 오페라 ‘카르멘’의 주인공 이름을 따 지었지만, 딸이 이를 좋아하지 않아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의 주인공 미미로 바꿔줬다고 한다. 빈 대학 입학 전 강의 노트를 쓰기 위해 속기를 배웠다. 이게 그의 운명을 바꿔놓은 셈이다.
 
1936년쯤 그는 결혼해 크라쿠프에서 아들 샤샤를 낳았고 1939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자 아들을 헝가리에 있는 친척에게 보낸 후 부부는 크라쿠프의 수용소에 감금됐고, 남편은 수용소에서 탈출하다 총에 맞아 숨졌다. 1944년 아우슈비츠에서 집단 학살을 당할 뻔했던 유대인 수감자 중 라인하르트를 포함한 ‘필수 노동자’들은 탄약 생산 공장으로 옮겨졌다. 공장에서 사실상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쉰들러의 ‘위조된’ 보고서 덕분에 이들은 1945년 5월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라인하르트는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고 1957년 뉴욕 맨해튼으로 이주해 50년간 정착했다. 두 번째 남편이 2002년 사망한 후 2007년 아들이 있는 이스라엘로 이주한 후에야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으며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쉰들러의 변화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생존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2007년 이스라엘 신문 하레츠에 “그는 천사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가 나치의 가장 높은 계급이라는 걸 알고 있었죠. 밤엔 부하들과 함께 술을 마시러 나가면서도 (자신을 포함한) 그들이 우리에게 저지르는 짓을 견딜 수 없어 했어요. 저는 항상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목숨을 거는 남자를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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