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량’ 이병주, 젊은 문학도에게 술 사주며 얘기꽃 피워

중앙일보

입력 2022.03.19 00:02

수정 2022.03.19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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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한끼 

소설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이병주는 40대 중반의 나이에 본격적으로 문학계에 발을 들인 '늦깎이 소설가'다. 지리산, 관부연락선 등 80권이 넘는 소설을 썼다.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체험한 역사적 사실이 소설의 근간이 되어줬다. 그는 1992년 노환으로 사망하기까지 집필에 열을 올렸다. 1986년 서재에서의 이병주. [중앙포토]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다’라고 말한 이는 파스칼이다. 이를 ‘사람은 갈대처럼 (유연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해석한 건 고바야시 히데오다. (소설 『지리산』 중에서) 갈대의 유연함을 전혀 허용치 않았던 1970년대, 80년대의 무거운 공기 속에서 갑갑하게 눌려 살던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이병주라는 제3지대는 구원이고 해방이었다.
 
이병주(1921~1992)는 경남 하동 북천에서 태어났다. 진주농업학교를 거쳐 시인 하기와라 사쿠타로(萩原朔太郎, 1886~1942), 소설가 요코미쓰 리이치(横光利一, 1898~1947), 문학평론가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 1902~1983) 등 당대의 쟁쟁한 문인들이 포진한 도쿄 메이지대학 문예과에 입학했다. 청년 이병주는 불어 및 불문학을 맡았던 고바야시를 흠모했다. 랭보, 보들레르, 도스토옙스키를 열강하다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태연하게 강의실에서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어 내는 그의 파격이 멋있었다.
  
일본 유학 땐 괴짜 스승 고바야시 흠모
 
고바야시는 언제나 문학 이상이었다. 그는 모차르트에 정통했다. 그는 우메하라 류자부로(梅原龍三郎), 고흐, 루오 등의 명화와 조선과 일본의 골동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갖고 있었다. 석굴암의 의연한 아름다움에 질투와 피로를 느꼈던 미의 순례자 고바야시였다. 당시 도쿄에 유학했던 수많은 한국인 유학생 가운데 고바야시를 삶의 좌표로 삼은 이는 거의 없었다. 식민지 출신의 고단한 유학생들이 받아들이기엔 고바야시의 문질빈빈(文質彬彬)은 너무 눈부셨다. 그러나 이병주는 그가 어쩐지 진주 한량을 닮았다고 느꼈다. 이병주가 나서 자란 서부 경남 남자들의 이상형이 선비의 학문에 파격의 예술 감각이 더해진 이른바, 한량이 아니었던가. 고바야시 못지않은 천부의 넉넉함, 고도(古都) 진주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배양된 교양과 미감의 청년 이병주는 고바야시의 광휘를 두려움 없이 받아들였다.


진주의 교방음식은 궁중음식을 닮았다.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진주의 기생들이 한양의 궁중으로 차출됐다. 여기서 익힌 궁중음식이 진주의 교방음식이 되고 진주음식의 기준이 됐다. 진주음식은 깔끔하고 담백하다.
 
‘한 줌밖에 안 되는 메밀국수에 볶은 고기를 가늘게 썰어 넣어 배와 생강으로써 맛을 여민 육수로 된 이른바 진주냉면이 쿠사마의 호물(好物)이었다.’(소설 『지리산』중에서) 지금은 사라진 1940년대의 진주냉면을 이병주는 진주농업학교 영어교사 쿠사마의 입을 빌려 기록해 놓고 있다. 진주냉면은 식사로 배불리 먹는 음식이 아니다. 늦은 밤 속이 출출해지는 시간에 한량들이 밤참으로 때우는 상징의 음식인 만큼 양이 적고 소화가 빨라야 한다. 지리산, 진주평야, 남해에서 물산이 풍부하게 공급되었기에 진주음식의 재료는 품격이 높았다. 진주는 냉면이고 비빔밥이고 가짓수는 적지만 품격 높은 재료를 단순하게 배치한다. 엉뚱한 재료를 더해 주물럭거리지 않는다. 문(文)이 결코 질(質)을 넘어서지 않는다. 몸의 음식으로 정신의 교양을 익힌 이병주였다.
 
이병주는 학병으로 징집돼 중국으로 파병됐다. 병졸의 그를 위로해 준 것은 시베리아 유형 생활 속에서도 영혼의 구제법을 터득했던 도스토옙스키였다. 도스토옙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 속의 짙은 어둠을 배채(背彩)하자 그 어둠에 밀려 병졸이라는 초라한 존재의 막이 조금씩 밝은 빛으로 따뜻하게 부풀어 올랐다. 전쟁이 끝났다. 해방 이듬해에 조국에 돌아왔다. 모교 진주농업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6·25 전쟁 중에 진주 해인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1956년 해인대학이 마산으로 옮기자 그도 마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지난 해 이병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출간 된 이병주 문학선집. 총 12권 구성. 정준희 기자

‘마산은 이를 도시라고 하기엔 등지고 있는 산들이 너무나 웅장하다. 마산은 이를 항구라고 하기엔 앞으로 한 바다가 너무나 정숙하다.’(소설 『돌아보지 말라』 중에서) 웅장하고 정숙한 도시 마산에는 시인 김춘수, 파스텔화가 강신석, 조각가 문신, 언론인 안윤봉 그리고 협객 상하이 박이 있었다. 그들의 아지트는 신마산의 외교구락부였다. 직장을 부산의 국제신문으로 옮기기 전까지 3년간의 마산 생활은 삽상했다. 국제신문에 쓴 논설이 빌미가 되어 5·16 때 2년 7개월간 복역했다. 1965년 ‘세대’지에 소설 ‘알렉산드리아’가 발표되면서 본격적인 소설가로서의 생활이 서울에서 시작됐다.
 
이병주는 가끔 서울을 떠나 마산을 찾았다. 의령 출신의 안윤봉(1926~1983)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설 『지리산』에 안명제로 등장하는 안윤봉은 경성고상(서울상대) 출신으로 음악, 미술에 모두 조예가 깊은 마산의 문화 명사였다. 1977년 안윤봉이 경남매일의 기획실장일 때다. 이들이 간 곳은 산호동 월남다리에서 해안가 못 미쳐 있던 ‘화신순대국집’이었다.
 
국밥집의 주인은 마산여고를 나와 이화여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재원이었다. 둘은 순대국에 소주를 마셨다.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안윤봉은 이병주를 만나 말문이 터졌다. 취기가 오르자 돌연 두 사람은 암구호를 맞추듯 ‘이스크라(불꽃)’를 외쳤다. 레닌이 창간한 당기관지 ‘이스크라’가 날카로운 파도로 살아나 깊은 밤 남해안의 허름한 식당 유리창을 두드렸다.
  
북한산 성벽에 앉아 아주머니들과 대작
 
서울에서 만난 하동 출신에는 영화배우 최지희(1940~2021), 나중에 검찰총장이 된 정구영(1938~ ) 등이 있었다. 정구영은 종로 관수동의 ‘낭만’에서 맥주를 마시다가 근처 관철동 장원빌딩 1층의 ‘사슴’에 이병주가 왔다 하면 그리로 달려갔다. 사슴은 낭만의 미쓰 리가 나가서 독립한 술집으로 낭만보다는 술값이 비쌌다. 젊은 여성 문학지망생에게 술을 사 주며 이야기에 열중하는 이병주의 모습은 어쩐지 스승 고바야시를 닮았다. 이병주와 정구영은 논현동 건설회관 지하의 최지희가 경영하던 식당 ‘지희네’를 가서 세 사람이 함께 술을 마셨다. 이병주는 주로 위스키에 물을 타는 방식, 이른바 미즈와리를 즐겼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리기 몇 달 전, 일본의 소설가 나카가미 겐지(中上健次, 1946~1992)가 서울에 와서 이병주를 찾았다. 나카가미의 뉴욕 시절 친구인 사진가 임영균(1955~ )과 함께였다. 윤흥길, 한수산, 박범신 등 한국의 문인들 그리고 화가 이우환과 가까웠던 나카가미가 일본통인 전옥숙(영화감독 홍상수의 어머니)을 통해 이병주까지 연결되었던 것.
 
나카가미의 거친 캐릭터는 고바야시와 정반대였다. 어둠을 어둠의 질감 그대로 두툼하게 드러내는 스타일이었다.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과 함께 ‘고바야시 히데오를 넘어서서’라는 대담집을 이미 10여년 전에 낸 바가 있는 나카가미가 이병주는 궁금했다. 둘은 배짱이 맞았다. 인사동의 한식집 ‘선천’의 방 하나가 소란스러워졌다. 이병주가 취흥을 못 이겨 러시아 노래를 불렀다. 2차는 종로의 ‘파인힐’이었다. 술은 역시 위스키였다. 이병주는 독주를 좋아했다. 호방한 외모의 애주가 이병주는 굵은 뿔테 안경을 끼고 텔레비전에 장생 오가피주의 술 광고 모델로도 등장했다.
 
이병주는 한문, 일어, 영어, 불어 등 여러 언어에 능했다. 그리고 그 언어들의 최상위 논리구조인 수학에 능했다.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늦은 밤 수학 문제를 풀었다. 가끔 러시아의 걸출한 여성 수학자 소피야 코발렙스카야(1850~1891)를 떠올렸다. 이병주는 역사와 인간을 실수와 허수로 대별했다. 직선으로 늘어진 가시적인 역사도 제곱근을 구하면 그 진면목에 허수를 포함한 복소수 평면이 나온다. 그 복소수를 곱하면 다시 실수의 현상계가 드러난다. 그는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고 술회했다. 굵직한 선형의 산맥 아래 숨은 겹겹의 평면으로 얽힌 허수의 골짜기를 이병주는 추적했다. 그리고 역사와 인간사의 복잡다단함을 연립 미분방정식을 풀 듯 차근차근 풀어서 소설로 옮겼다.
 
문학에 문학 이상과 문학 이하가 있다면, 이병주는 문학 이상이었다. 단순한 일차방정식으로는 풀리지 않는 박람강기의 문인이었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