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받는 의사가 산모 이름 모른다…첫 '내밀 출산'에 日발칵 [도쿄B화]

중앙일보

입력 2022.02.04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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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의 [도쿄B화]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너무 다른 일본. [도쿄B화]는 사건사고ㆍ문화콘텐트 등 색다른 렌즈로 일본의 뒷모습을 비추어보는 중앙일보 도쿄특파원의 연재물입니다.

"임신 9개월인데 부모님에겐 알리고 싶지 않습니다. 아기 아빠의 폭력도 두렵습니다. 제 신분을 감추고 출산을 할 수 있을까요."

지난해 11월, 일본 구마모토(熊本)에 있는 시케이(慈恵)병원에 이런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보낸 사람은 10대 임신부. 원치 않는 임신을 했지만 어릴 적부터 자신을 학대해온 부모에게 임신 사실이 알려질까 두렵다며 도움을 청한 겁니다.
 

'내밀 출산'을 시행하고 있는 일본 구마모토 시케이병원의 안내 동영상 중 한 장면. [유튜브 화면 캡처]

 
12월, 병원을 찾은 여성은 신생아 상담실장에게만 건강보험증, 학생증 등으로 자신의 신원을 밝히고 출산을 합니다. 분만을 담당한 의료진들조차 이 여성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였죠. 출산 후엔 아이의 특별 입양을 원한다는 서류를 작성하고 병원을 떠났습니다. 
 
지난달 병원 측의 공개로 알려진 일본의 첫 '내밀(內密) 출산' 사례입니다. '비밀 출산', '익명 출산'으로 불리기도 하는 내밀 출산은, 산모가 자신의 신원을 감춘 채 아이를 낳고 출생 신고를 하는 것을 뜻합니다. 


일본에서 내밀 출산을 처음 시도한 시케이 병원은 지난 2007년부터 미혼모 등이 낳은 신생아를 맡아주는 '황새의 요람(베이비박스)'을 운영해 온 병원입니다. 당시 아시아에선 처음 베이비박스가 운영된 사례로 화제를 모았죠. 내밀 출산은 지난 2019년 시작했습니다. 병원에 신원을 알리고 출산을 하기 힘든 상황의 여성들이 홀로 아이를 낳다 위험에 처하거나 아이를 버리는 경우를 막자는 취지에섭니다.
 
그 사이 몇 명의 임산부가 내밀 출산을 원하며 병원을 찾았지만, 출산 후 아이를 자신이 키우기로 마음을 바꾸고 출생 신고도 직접 했습니다. 병원은 이번에도 아이의 출생신고를 하지 않고 산모와 지속해서 연락하며 아이를 직접 양육하는 쪽으로 결정하길 기다려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성은 고민 끝에 입양을 결정했습니다. 4일 병원 측은 서류에 그의 이름을 적지 않은 채 병원이 대리인으로 나서 아이의 출생 신고를 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라 생모의 이름이 병원 기록에도, 출생 신고서에도 존재하지 않는 첫 '내밀 출산' 사례가 됐습니다. 
 

장점 많지만 현행법과 충돌  

시케이 병원의 내밀 출산은 최근 일본에서 논쟁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어머니와 아이를 '원치 않는 공개'로부터 보호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일본 실정법과 충돌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죠.  

 

일본 구마모토시 시케이병원에 설치된 '황새의 요람(베이비박스)'. [유튜브 화면 캡처]

'황새의 요람'(베이비박스)을 운영하는 일본 구마모토 시케이 병원 안내 동영상 중 한 장면. [유튜브 화면 캡처]

 
일본 호적법은 출생 신고를 할 때 유기아(遺棄兒)의 경우 부모가 누군지 알면 이름을 기재하게 되어 있습니다. 병원 측이 어머니의 신원을 알면서도 이를 감추고 출생 신고서를 내면 호적법에 저촉될 수 있고, 형법상의 공정증서 원본 부실기재죄로 처벌될 수도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부모의 익명권과 아이의 알 권리가 충돌하는 것도 중요한 고려사항입니다. 시케이 병원의 경우 내밀 출산을 한 산모의 정보는 병원에서 비공개로 보관합니다. 아이가 일정 정도 나이가 되면 자신의 출생 정보를 열람할 수 있게 하자는 거죠. 그러나 산모가 아이에게 신원을 공개하는 것조차 원치 않을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로 남습니다.  
 
병원 측은 출생 신고를 하기 전, 어머니의 이름을 적지 않고 출생 신고서를 내는 것이 법을 위반하는지에 대해 일본 법무국에 답변을 요청해놓은 상태라고 합니다. 하스다 겐(蓮田健) 원장은 "엄마와 아이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내밀 출산은) 의의가 있으며 비슷한 상담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면서 "행정이 현실적인 대응방안을 찾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내밀 출산의 법제화에 동의하는 학자들 역시 "어린이 인권과도 관련한 문제인 만큼,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인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4일 일본 구마모토현 시케이병원 의료진이 병원에서 시행한 내밀 출산에 대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NHK 방송화면 캡처]

프랑스·독일·미국 등은 익명 출산 보장

한국에서도 현행법상 산모가 익명으로 아기의 출생신고를 할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내밀 출산이 법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상황이란 것이죠. 이에 따라 영유아의 유기·살해 방지를 위해 산모의 익명성을 보장해 안전한 환경에서 아이가 태어날 수 있도록 하는 '보호출산제'를 제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프랑스와 독일·미국 등에서는 전면, 혹은 부분적으로 익명 출산을 보장합니다. 프랑스는 법적으로 '완전한 익명 출산'이 가능해 아이가 성인이 된 후 친부모를 찾고자 해도 부모가 원하지 않으면 정보가 공개되지 않습니다. 독일은 아이가 만 16세가 되면 법원을 통해 친부모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적 익명 출산'을 허용하죠.  
 
그러나 이들 국가에서도 여전히 이 제도가 아동의 친부모 알 권리를 박탈하는 조치라는 비판이 나옵니다. 일본 정부가 첫 내밀 출산 사례에 어떤 결론을 내릴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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