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론 이 시절을 청년기까지 오롯이 살아온 탓인지 직업이 글 쓰는 일이지만, 늘 글과 말로 하는 표현에 대한 습관적 두려움을 느끼곤 했다. 내 반생의 언론인 생활은 그 두려움과의 싸움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이런 싸움을 계속했던 건, 그런 시절을 살았기에 ‘표현의 자유’ 만큼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필생의 과제로 자리 잡은 때문이었을 거다. 어쨌든 그것이 평생을 쫓아다닌 말에 대한 두려움의 극복 또는 반동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표현의 자유’는 세상의 무수한 가치 중에서도 내게 있어 최상위 가치다. 물론 이 얘기는 지금 세대에겐 무슨 ‘시대물’처럼 들릴 거다. 지난 연대 동안 우리는 꾸준히 발전해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사회를 만들었으니 말이다.
표현의 자유는 인간의 절대 가치
그러나 자유는 절제 위에 완성돼
표현의 자유가 후퇴하지 않도록
이젠 우리말을 돌보고 절제할 때
그러나 자유는 절제 위에 완성돼
표현의 자유가 후퇴하지 않도록
이젠 우리말을 돌보고 절제할 때
정 부회장은 시쳇말로 이 시대의 ‘핵인싸’ ‘인플루언서’다. 그가 SNS에 올린 커다란 반지 케이크에 촛불을 켠 사진이나 자신의 요리 솜씨를 뽐내는 사진들은 그를 팔로우하지 않아도 언론 매체들까지 나서서 실어 나르는 통에 저절로 눈에 띄고, 그가 ‘멸공’ 한마디를 외치자 대통령 후보부터 유력 정치인들까지 이마트로 달려가 카트를 끌며 멸치와 콩을 사나르는 퍼포먼스를 벌일 정도다. 그런 유명인 오너에게 노조가 ‘차라리 경영에서 손을 떼라’고 일침을 가할 수 있는 시대가 정말 좋다.
표현의 자유는 우리 사회를 변화시켰다. 사람들은 자신의 억울함, 불합리, 부조리를 스스로 고발한다. 또 여성의 이슈로 보자면 성희롱·성추행·성폭행 같은 문제들이 표면화되고, 그것이 범죄라는 인식이 확실히 정착된 것도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내가 경찰출입 기자로 일하던 30여 년 전만 해도 우리 사회는 이 문제에 대단히 ‘관대’ 혹은 ‘무지’했다. 경찰서에선 성폭행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란히 앉히고 피해자에게 “기분이 어땠어요?” “(가해자는) 피해자 본인도 즐겼다고 하던데 맞나요?” 하고 묻는 게 예사였다. 그런가 하면 주변 형사들은 “왜 빨간색 옷을 입고 다니나. 그러니 성폭행을 당하지”하며 거들었다. 지금 성폭력이 과거보다 더 많아지거나 심각해진 게 아니라 과거에 입 다물고 있던 문제들을 표현하기 시작하면서 인식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이다.
문제는 요즘 ‘표현의 자유’, 그 자체에 대한 피로감이 쌓여가고 있다는 것이다. 가짜 뉴스, 거짓말, 음모론, 혐오, 무차별 욕설…. 표현의 자유 뒤꼍에선 이를 위협하는 지나친 수다스러움과 역겹고 저열한 말들이 판을 친다. 이에 일각에선 ‘혐오’ 등 표현의 자유를 일부 규제해야 한다는 담론이 나온다. 이러한 사회적 고민이 시작된 지도 꽤 오래됐다. 나도 칼럼을 찾아보니 2010년대 초반부터 꾸준히 관련 글을 썼다. ‘언론부터 정신 차리자’(본지 2014.7.30. 양선희의 시시각각), ‘거짓말도 표현의 자유다’(본지 2015.1.14. 양선희의 시시각각) 등을 다시 보았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어떤 경우라도 표현의 자유를 규제해선 안 된다는 주장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다. 그것은 일부라도 규제하는 순간 자유를 잃게 되고, 자기 검열에 빠지고, 언로를 막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 맘대로 내키는 대로 내지르는 건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절제와 한 쌍을 이루는 것이고, 절제 없는 자유는 그저 폭력일 뿐이다. 실제로 지금 우리는 ‘표현의 자유’와 ‘표현의 폭력’ 사이를 오가고 있다. 누군가는 이를 빌미로 제도적 규제를 들이밀지도, 어쩌면 대중들이 차라리 저들의 입을 막아달라고 규제를 요청할지도 모를 정도다. 자유 의지와 지성으로 절제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유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만인 칼럼니스트 시대. 편협한 안목에 글 짧은 지껄임까지 ‘내 말 좀 들어라’며 나대는, 마치 ‘소단쟁명’(小短爭鳴)이라도 벌이는 듯한 이 시대에 누군가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래서 내가 먼저 펜을 놓기로 했다. 이제 마지막 칼럼을 내려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