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업 ‘빅2 M&A 불발’ 후폭풍
대우조선해양의 최대주주인 KDB산업은행은 2019년 현대중공업과 M&A 계약을 체결했지만, 한국의 조선 분야 경쟁국 5곳을 포함한 6개국(한국·중국·일본·EU·싱가포르·카자흐스탄) 승인이 전제 조건이었다. 한 곳이라도 불허하면 M&A도 어렵다는 얘기다. 대표적 기간산업인 조선업은 국가 간 이해관계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는 분야라 이런 절차를 거치는 게 불가피했다. 이후 지난해까지 중국과 싱가포르, 카자흐스탄이 각각 기업 결합을 승인했지만 이번에 EU가 불허하면서 M&A 자체도 사실상 무산된 것이다. EU는 두 기업이 합쳐졌을 때 액화천연가스 운반선(LNG선) 시장 독과점이 심화될 수 있어 불허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목소리는 지난해 업계 실적에 뼈아픈 ‘착시’가 존재한다는 점에서도 힘을 얻는다. 예컨대 빅3는 8년 만의 최대 수주에도 영업이익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한국조선해양(-7122억원)과 대우조선해양(-1조3011억원), 삼성중공업(-1조1428억원) 모두 큰 액수의 영업손실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주범은 빠른 경기 회복세에 지난해 1분기 대비 하반기에만 2배 이상 급등한 선박용 후판(두께 6㎜ 이상의 철판) 가격이다. 업계 관계자는 “후판 가격 인상으로 대손충당금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올해도 원자재 가격 상승이 유력하다는 점에서 업계는 한숨을 짓고 있다.
장기 불황과 중국의 공세 속에 원치 않는 저가 수주 경쟁에 내몰린 것도 지난해 적자 심화를 부추겼다. 엄경아 신영증권 연구원은 “경쟁상대를 제치고 최대한 수주하기 위해 저가 계약을 했는데 그사이 원자재 가격이 올라 마진을 남기기가 한층 어려웠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빅3의 빅2 재편이 무산된 만큼, 똑같은 어려움이 올해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국내 기업 간에도 수주 경쟁이 존재하는데 2곳보다 3곳일 때 눈치 싸움이 더 치열할 수밖에 없어서다. 정부와 업계가 빅2 재편을 국내 기업 간 출혈 경쟁 완화와 이를 통한 국제 경쟁력 강화의 계기로 봤던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 업계는 내년부터 본격화되는 글로벌 친환경 규제까지 신경 써야 하는 삼중고에 처해 있다. 지난해 국제해사기구(IMO)는 2023년부터 4년간 매년 2%씩 약 3만 척의 선박이 배출하는 탄소를 저감한다는 규제 방안을 채택했다. 수주 선종 가운데 비중이 높은 대형 컨테이너선은 탄소 배출량이 많아 이 같은 규제에 특히 타격을 입는다. 업계 관계자는 “일본은 국토교통성에서 조선사와 해운사, 에너지 회사가 서로 협력해 대체 연료 등 친환경 기술을 개발하도록 돕는 클러스터를 꾸리는 등 국가적으로 대응 중”이라며 “한국도 국가 차원에서 친환경 규제에 대비해야 수주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외에 수주 물량 자체도 지난해 경기 회복세에 많았을 뿐, 올해는 다를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양종서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지난해 수주 실적은 코로나19 팬데믹 진정에 대한 기대감으로 증폭된 측면이 있다”며 “공급 과잉 우려도 있어 컨테이너선 등의 발주가 지난해만큼 있진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일각에선 내년에 대한 낙관론도 나온다. 지난해 3분기말 국내 기업의 수주 잔량은 2856만CGT(표준선환산톤수)로 약 2.5년치의 일감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김용환 서울대 조선해양학과 교수는 “올해 ‘최소한 불황이 아닌 상태’를 유지한다면 내년부터는 더 눈에 띄는 실적 개선이 가능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올해 수주 물량이 줄더라도 업황 둔화까지 의미하진 않는다는 분석도 있다. 한영수 삼성증권 연구원은 “수주 물량 감소는 기업들의 수주 전략 변화에서도 비롯된다”며 “예컨대 이미 충분한 일감을 확보한 기업들이 나중에 인상된 선가로 수주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수주에 뜸을 들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