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뮤지컬 ‘팬레터’ 주연 려욱·백형훈
뮤지컬 ‘팬레터’(3월 20일까지 코엑스아티움)가 그리는 세계다. 한국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김유정과 이상을 모티브 삼은 무대로, 2016년 초연 이래 아름다운 음악과 시적인 대사가 큰 사랑을 받으며 창작뮤지컬로서는 독보적인 누적관객 10만명을 돌파했다. 일제강점기 순수문학을 향한 문인들의 열정이라는 순한 맛 외피 속 팬과 스타의 ‘금지된 사랑’이라는 마라 맛 알맹이가 매혹적이다.
최근 개막한 4번째 시즌은 캐스팅도 흥미롭다. 최장수 아이돌 슈퍼주니어의 막내 려욱(35)이 ‘팬’의 입장인 세훈이 됐고, 지난 시즌까지 세훈 역으로 사랑받던 백형훈(35)은 ‘스타’인 해진 역으로 이동했다. 둘 다 팬레터를 꽤 받아본 사람들이지만, “팬데믹 탓에 팬레터가 더 귀해졌다”(형훈)고 아쉬워한다. “특히 군대에서 팬레터를 엄청 기다렸던 것 같아요. 아들딸 다 키우고 저를 보는 낙으로 산다는 한 어머니 팬이 계셨거든요. 군에서도 힘내라면서, 제가 불렀던 노래 잘 듣고 있다고 격려해주셨는데, 나이가 중요하지 않구나 싶었죠. 요즘엔 소식이 뜸한데, ‘팬레터’는 보셨는지 모르겠네요.(웃음)”(려욱)
누적 관객 10만 명 넘은 창작뮤지컬
반면 려욱은 “세훈이 가진 슬픔이 나와 닮았다”고 했다. ‘영원한 아이돌’이 가진 슬픔이란 뭘까. “원래 혼자 노는 스타일이거든요. 그래서 혼자 노래연습도 많이 했고, 거울이 친구였어요. ‘슈주’하면서 많이 바뀌었지만 형들이 아니었으면 계속 그랬을 걸요. 그러면서도 누군가 다가오면 신나게 얘기하고 사람을 쉽게 믿는 것도 세훈과 닮았죠. 사기당하기 좋은 스타일이긴 해요.(웃음)”(려욱)
‘팬레터’는 중세 최고의 신학자인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비극적 사랑을 곳곳에 인용한다. 편지를 매개로 할 때만 아름다운 사랑도 있고, 어쩌면 환상 가득한 ‘팬심’도 그런 것일지 모른다. “글쎄요, 저는 누군가에게 환상을 가진 적은 없어요. 경외심이 들 때는 있지만 팬심은 거의 안 생기죠. 세훈 역을 했을 땐 그저 처절한 사랑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형훈) “저는 어려서부터 아이돌을 많이 좋아했고, SES 바다 누나 팬클럽이었죠. 그땐 요정이라는 환상이 있었지만 이젠 제 고민을 들어주는 사람으로 좋아해요.(웃음) 세훈의 마음도 사람 대 사람의 사랑으로 접근했죠. 세훈은 해진에게 엄마를 느꼈을 것 같거든요. 슬프고 외로운 소년이 나를 알아봐주고 따뜻하게 지켜봐주는 햇살같은 사람을 엄마처럼 사랑한 게 아니었을까요.”(려욱)
“산전수전 다 겪은 최장수 아이돌답게 후배 걱정을 해주는 참 선배”라는 형훈의 추임새처럼, 려욱은 아이돌로서의 정체성이 확고했다. 그러고보면 ‘내 안에 또 다른 나’라는 작품의 모티브처럼 두 배우도 각각 아이돌과 크로스오버 가수라는 또 다른 페르소나를 갖고 있는데, ‘본캐’는 퍽 대조적이다. 형훈은 무대와 자신을 철저히 분리하는 냉철한 연기자인 반면, 려욱은 아이돌 안에 ‘히카루’처럼 반짝이는 배우라는 ‘부캐’를 품고 있었다.
“저는 ‘슈주’로서 자연스럽고 형들과 있는 게 좋아요. 형들이 보러오면 아마 엄청 웃을걸요. 무슨 작품을 해도 그냥 저로 보일테니까. 사실 배우라는 타이틀은 아직 부담스럽고, 어디 가도 꼭 ‘슈주 려욱’이라고 말해요. 뮤지컬 왕성하게 하는 규현이에게도 많이 배우고 있고, 제가 ‘슈주’이기 때문에 좋은 작품도 할 수 있는 거죠.”(려욱) “저는 배우 활동이 훨씬 자유로워요. 자신을 드러내는 것보다 다른 인물을 표현하는 게 편하달까요. ‘팬텀싱어’에 나간 것도 뮤지컬배우로서 저를 소개하고픈 마음이었지 ‘한국의 일디보’가 되겠다는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죠. 분에 넘치는 관심과 사랑을 받다보니 흉스프레소로서도 최선을 다하지만, 저는 배우라고 생각해요.”(형훈)
두 사람은 2014년 ‘여신님이 보고 계셔’ 이후 7년 만에 다시 만난 사이다. 동갑내기 친구지만 10살 이상 차이 나는 설정의 연기가 자연스러운 건 려욱의 ‘최강동안’도 한몫하고 있다. 하지만 배우에게 동안이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장단점이 있죠. 동안도 하나의 선입견일 뿐인 걸요. 동안이라 어떤 역할을 못할 것이라고 쉽게 단정하지만, 그걸 깨야 되는 게 저라고 생각해요. 안 어울릴 것 같은데 해내면 거기서 오는 충격이 있고, 그런 게 예술 아닌가요. 어딘가에 갇히게 되면 이미 그 예술은 죽은 것이죠. 저를 바라보는 선입견을 언젠가 깰 수 있다는 면에서 장점같아요. 오히려 세훈 같은 찰떡 캐릭터를 만나면 겁이 나죠. 내가 이걸 못하면 다른 건 어떻게 하나 싶고. 스스로 긍정적으로 생각을 바꿔보자고 마음먹었는데, 제 안의 히카루가 그렇게 얘기해준 지도 모르죠.(웃음)”(려욱)
사실 ‘팬레터’의 최고 강점은 아름다운 넘버다. 최고의 가창력을 가진 ‘고막샤워팀’인 두 사람이 돋보이는 이유기도 하다. “넘버가 좋으면 연습할 때 듣고만 있어도 행복한데, 려욱은 모든 넘버가 그랬어요. 려욱이 노래하면 뒤에서 다들 ‘캬~’하면서 엄지척이었죠. 넘버가 대사를 대신하는 것이니 단순히 노래만 잘해서는 드라마의 감동을 받을 수 없는데, 이미 훌륭한 배우가 되어있기에 젖어드는 것 같아요. ‘슈주’이기에 좋은 작품을 하는 게 아니라, 뮤지컬배우들보다 더 성실하게 작품에 임하는 모습이 지금의 결과를 만든 것이죠.”(형훈) “형훈이야말로 발라드 황제의 진수를 보여주죠. ‘그녀를 만나면’을 부를 때 모든 게 핑크빛으로 보이면서 따뜻해지는데, 세훈을 웃음짓게 만드는 6번 넘버를 기억해주세요.(웃음) 7년 전에도 잘하는 친구였는데, 군대서 TV를 켜니 팬텀싱어가 되서 큰 사랑을 받고 있더군요. 서로 한뼘씩 성장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고, 다음엔 또 어떤 모습으로 만날지 기대하게 됩니다.”(려욱)